■ Story
영화감독인 수현(백현진)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가족처럼 지내온 애견 뽀삐가 시름시름 앓다 죽자 한없는 상실감에 젖는다. 그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개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개를 키우는 사람들과 잇따라 인터뷰를 한다. 시베리안 허스키종인 두마라는 개를 한국 온돌방에 적응시킨 추리작가 주인, 산 지 일주일 만에 목숨을 잃은 미니어처 슈나우저의 주인인 배우, 진돗개 자비의 ‘수행정진’을 위해 동정(童貞)상태를 계속 유지시키고 있는 스님 등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수현은 자신과 뽀삐가 지내온 나날들을 추억한다.
■ Review
<뽀삐>는 아끼던 강아지를 저승으로 떠나보낸 인물을 중심으로 ‘애견인’들의 특별한 사연을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에 녹인, 독특하고 유쾌한 영화다. 공동연출작 <바다가 육지라면>에서 각기 다른 라면 조리법을 통해 그만큼 다양한 삶을 보여줬던 김지현 감독은, <뽀삐>에서도 개라는 거울을 내세워 우리들의 초상을 비춘다.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 수현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애견 뽀삐가 죽은 뒤 ‘개 죽은 것 갖고 뭘 그러냐’는 어머니의 말에, “엄만 왜 뽀삐 보고 개래 만약 엄마가 죽었을 때, 그냥 ‘사람 죽었다’고 하면 기분 좋겠어”라고 따지는 열혈 애견인. 이뿐만이 아니다. 뽀삐가 세상을 뜬 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강아지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하며, 그의 모친은 뽀삐가 극락왕생하라며 불공을 드리기도 한다. 개를 포함한 애완 동물을 사람 이상으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아직 사회적 합의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한국사회의 사정(‘아직도 도시락을 못 싸가는 학생이 있는 상황에서, 일부 부유층의 경우 애완견의 미용이나 액세서리에 신경을 써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투의 뉴스 꼭지는 심심할 만하면 방송을 탄다)을 고려할 때, 개의 죽음에 호들갑떠는 수현의 모습은 과도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비단 수현만의 모습이 아니다. 수현이 영화 속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은 자신의 ‘애견 체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자신의 감정을 함께 전한다. 영화 속 애견인들은 바람부는 날이면 베란다에 우두커니 앉아 고향인 북쪽 벌판을 추억하는 시베리안 허스키종 개나 항상 가식적인 표정과 말로 상대해야 하는 남자친구와 달리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강아지에 관한 사연을 말한다.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쓸쓸해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동안 스스로 개에게 저질렀던 온갖 악행들을 뉘우치게 될 정도다.
그렇다고 <뽀삐>는 개에게 무한한 사랑을 바쳐야 한다거나 ‘견권’(犬權)을 확보하자고 고래고래 외치는 영화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뽀삐>는 개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다. 영화가 주목하는 바는 개 자체라기보다 각각의 사연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언술행위쪽이다. 눈물 흘리는 연기를 위해 개 사진을 동원했다는 영화배우가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예를 들어보자. 그녀는 애완동물 가게에서 40만원을 주고 슈나우저를 샀는데 곧 시름시름 앓아 20여만원을 들여 치료를 했지만 끝내 죽어 1만원을 주고 화장 처리했으며 가게 주인에게 따지러 간 길에 주차위반을 해 4만원을 더 물게 됐다. 개의 사진을 볼 때 그녀 눈에 물기가 맺히는 것이 개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깝기 짝이 없는 돈 때문인지 아리송해진다.
비단 이 에피소드에서만이랴. 수행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해 진돗개를 생식의 욕구로부터 차단한 스님이나 포메라니안에게서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위안받는 여성, “사람과 어울리는 행동을 하는 확률을 높여준다”며 애견들의 거세수술을 주창하는 수의사 등에서 볼 수 있듯, <뽀삐>에 등장하는 개들은 스스로의 운명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지 못한다. 지극한 사랑을 받는 듯 보이는 영화 속 애견들은 키우는 사람들의 욕망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다. 영화 마지막 부분 수현이 개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엉뚱한 질문들이 어처구니없다기보다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개가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할까, 개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나, 그리고 개도 꿈을 꿀까, 그 꿈은 어떤 것일까 등등.
물론 <뽀삐>는 인간과 개에 대한 철학적 명상을 제공하는 따분한 영화가 아니다. 사람들이 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감독 나름의 시선을 통해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이 영화는 오히려 허물없는 웃음을 자아낸다.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거나 뒤튼 것도 아닌데 <뽀삐>를 보는 얼굴들은 연신 싱글거린다. 그건 사람들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감추려 하는 삶의 안감을 개라는 모티브를 이용해 들춰내는 감독의 탁월한 능력에 힘입은 것일 터. 웃음 뒤의 묘한 여운 또한 그 때문일 게다. 문석 ssoo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