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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싸인
2002-08-06

미지로의 귀의, 혹은 신과의 조우

■ Story

이웃의 수의사 레이(M. 나이트 샤말란)의 과실로 빚어진 참혹한 교통사고로 6개월 전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신앙까지 잃어버린 전직 신부 그래험 헤스(멜 깁슨)는 열살짜리 아들 모건(로리 컬킨)과 다섯살 난 딸 보(아비게일 브레슬린), 마이너리그 선수생활을 청산한 동생 메릴(와킨 피닉스)과 함께 필라델피아 45마일 외곽 옥수수 밭에서 살고 있다. 악몽에서 깨어난 어느 아침, 그래험과 식구들은 밭에 나타난 거대한 매직 서클을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이고, 어둠이 내리자 정체 모를 침입자가 집 주변을 맴돌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인도를 비롯한 도처에 매직 서클이 나타나고 급기야 UFO가 멕시코 상공에 나타나자 전세계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그래험은 창문에 못질을 하고 식구들과 집안에 숨는다.

■ Review

당신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서명이 든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반전? 초능력? 병든 아이의 예언? 길 잃은 중년남자의 각성? 극진히 사랑한 부부에게 닥친 부당한 불행? 따지고 보면 샤말란의 새 영화 <싸인>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싸인>은 뱀 같은 영화다. 파충류처럼 땅에 배를 깔고 지독하게 조용히, 아주 느리게 전진한다. 가끔씩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독니를 드러내 관객의 심장을 펄쩍 튀어오르게 만들면서.

그의 짜릿한 스릴러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관객의 척추에 최초의 냉기를 흘려보내는 데 샤말란은 그렇게 많은 대사를 소모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바람이 흔드는 옥수수 밭과 풍경이 내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아침. 차갑고 끈적한 악몽의 여운을 털어내며 집안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들판으로 뛰쳐나간 아버지에게 어린 딸이 천천히 묻는다. “아빠도 내 꿈 안에 들어온 거야?” 아들이 턱을 돌려주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남자의 눈에 널찍한 공터가 들어온다. 카메라가 공중으로 뒷걸음질치면서 공터는 둥그런 테두리를 드러내고 잠시 뒤에는 그것이 더 큰 문양의 한 고리임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싸인>은 그처럼 고요하지만 무작스럽게 거대한 ‘부자연스러움’으로 기선을 제압한다. <싸인>은 그러나 미스터리 서클의 비의(秘意)를 캐고 외계인들의 침략을 분쇄하는 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미스터리 서클이나 외계인은 사실상 맥거핀에 가깝다. <싸인>에서 서스펜스의 원천은, 신의 정의를 조롱하는 듯한 끔찍한 사고로 아내를 잃으면서 신앙을 포함한 삶의 믿음을 깡그리 잃은 남자 그래험과, 덩달아 그의 정서적인 진공 속에 함께 방치된 헤스 가족의 불안한 정신상태에 있다.

♣ 남자는 집안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들판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아들이 턱을 돌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그의 눈에, 널찍한 공터가 들어온다. 옥수수밭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 미스터리 서클이다.

♣ <싸인>의 골격을 구성하는 것은 외계인과의 충돌과 대립이 아니다. 카메라는 오직 TV로만 바깥 소식을 접하는 고립된 가족의 외딴 집안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공포에 집중한다.

당장 첫 장면부터 제목을 해명하며 시작한 <싸인>은 그뒤로도 알게 모르게 제목에 충실하다. 트럭에 하반신이 잘려 죽어간 아내의 마지막 말, 마시다 만 물컵을 잔뜩 늘어놓는 보의 버릇, 천식을 앓는 모건, 장기라고는 강한 스윙밖에 없던 메릴의 실패한 선수 경력, 배달 착오로 읍내 서점에 한권 남아 있던 외계인에 관한 책 등등. <싸인>의 실체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당도할 지점의 좌표를 알리는 수많은 ‘신호’들의 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판에 MIB 요원이 찾아와 “사실은 당신들이 외계인이었다”라고 통고하는 해프닝은 <싸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샤말란 영화를 단순히 기발한 ‘반전’으로 기억하는 관객에게 <싸인>은 감독을 유명하게 만든 영화들이 기실 역전 펀치 한방으로 승부하는 깜짝쇼가 아니라, 후반의 ‘폭로’가 만들어내는 앵글의 돌연한 이동에 따라 앞장면의 의미들이 일제히 뒤틀리는 잘 조립된 구조물임을 강조한다. 마지막 한 조각의 퍼즐이 끼워지는 순간 오리인 줄 알았던 도안이 토끼였던 것으로 판명되는 그림처럼.

M. 나이트 샤말란은 <싸인>에서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이 배어나는 스타일을 구사한다. 긴장이 고조된 예민한 순간에도 끼어드는, 전작보다 훨씬 늘어난 유머가 그 증거다. 삼촌과 조카들이 외계인의 독심술을 막기 위해 쿠킹호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엄숙히 앉아 있는 장면은 대표적 예. 또한 샤말란은 외딴 농가에서 TV를 통해서만 바깥 세상의 소식을 듣는 고립된 가족의 공포에 집중하고, 외계인과의 근접 조우를 가능한 한 유예함으로써 아주 적은 돈으로 은하계 전쟁을 연출해야 했던 과거 B급 SF영화의 초라하면서도 농밀한 분위기를 빌려온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싸인>에서 액션의 무기는 야구방망이고 스펙터클은 옥수수밭- 그것도 옥수수가 쓰러진 빈자리- 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반주자’ 버나드 허먼이 다시 살아온 듯한 음악과 이름 모를 새의 우짖음과 풍경소리, 전화벨이 어울리는 사운드도 고전적인 기법으로 시종일관 긴장을 흘린다. 그래서 <싸인>의 선조는 <인디펜던스 데이>가 아니라 <우주전쟁> <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며, 불 꺼진 지하실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블레어 윗치>의 무서운 기시감이 희미하게 포개진다.

그럼에도 <싸인>은 강렬하고 무섭다. 슬프고 교훈적이다. 첨단 특수효과로 테두리를 친 액션을 기대한 관객은 이 SF 미스터리의 망토를 쓴 애절한 가족드라마에 실망할 테지만 그것은 애초에 샤말란 영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기대이니 위로까지 필요치는 않을 것이다. 불편한 것은 <싸인>의 상징과 은유가 그것이 표상하는 내용과 너무 밀접하게 묶여 있다는 점이다. 모든 괴담, 초인, 외계 존재에 관한 이야기에 내재된 인간과 신의 얽힌 운명에 대한 질문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순진하게 던지는 <싸인>은 <식스 센스>나 <언브레이커블>보다 먼저 나오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이는 영화다. 그러나 <싸인>은 분명 기성품 장르영화의 조미료에 미각을 상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영화의 미묘한 쾌락을 상기시켜준다.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하는 것, 그건 확실히 샤말란의 장기다.김혜리 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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