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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흔들리는 얼굴과 날카로운 바늘 틈새로 스며드는 빛, <바늘을 든 소녀>

영화 <바늘을 든 소녀>는 최소한의 존엄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대, 살아남기 위해 고투하던 이들의 비극적 몸부림을 서늘하게 응시하는 작품이다. 덴마크의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는 가난과 임신, 전쟁 후유증 등이 제도 밖 여성의 몸 위에 겹쳐질 때 만들어내는 고통의 굴레를 황량하고도 냉정하게 포착해낸다. 1919년 코펜하겐,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카롤리네(빅 카르멘 손네)는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는다. 남편은 전선에서 실종되고, 임신한 몸으로는 일자리를 지켜낼 수 없다. 공장장과의 관계는 카롤리네를 보호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리고, 남편은 전쟁의 상흔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궁지에 몰린 카롤리네는 홀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다그마르(트리네 뒤르홀름)를 만나게 되고, 노동과 신체, 모성과 착취가 뒤엉킨 음영의 세계로 침잠해간다. 구조적 폭력의 말단으로 밀려난 카롤리네의 삶을 감싸고 있는 빈곤과 불결, 부패한 도시의 공기는 단순한 시대극을 넘어 공포영화에 가까운 감각을 선사한다. 이때의 공포감은 카롤리네가 연루되는 잔혹한 행위뿐 아니라 그를 지켜줄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비롯된다. 그러므로 영화는 특정 인물의 악의를 집요하게 분석하기보단, 시대가 찢긴 자리에 남겨진 빈틈에서 흘러나온 절망의 그림자를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

다그마르는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이 무엇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끝내 직면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는 잔혹한 시대를 통과하려는 발버둥처럼 다가온다. 영화는 또한 생존을 위해 구조에 종속되는 카롤리네의 선택 그 자체보다 선택이 강요되는 구조의 압력에 집중한다. 죄를 개인적인 악의로 축소하기보다는, 돌봄이나 신념처럼 ‘선’의 얼굴을 한 감정들이 어떻게 구조의 틈새에서 비틀리고 훼손되는지를 서서히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의 파고를 직접적으로 내세우기보단, 인물의 호흡에 밀착한 거리감과 음울한 흑백 화면을 통해 절제된 고통을 구축한다. 카메라는 종종 인물의 얼굴과 신체에 바짝 다가가 숨 돌릴 틈 없는 밀착감을 자아내고, 이는 시대적 압력에서 비롯된 고통의 형상과 조응한다. 빛과 그림자가 만든 미세한 불균형은 인물의 내면과 세상 사이의 균열을 닮아 있다. 음습한 골목의 진흙, 공장의 기계음과 공명하는 배경음악, 낡은 방의 어둔 공기까지, 거칠거칠한 시청각적 질감이 영화의 정조를 효과적으로 조성한다. 카롤리네 역을 맡은 빅 카르멘 손네의 응축된 기운 또한 영화의 정서를 견고히 지탱한다. 공포와 체념, 분노와 무감각을 오가는 미세한 표정 변화는 카롤리네라는 인물을 피해자성에만 가두지 않고, 끝내 분명히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겨둔다. 배우 트리네 뒤르홀름은 친절과 잔혹이 뒤섞인 인물 다그마르의 얼굴 위로 번지는 평온하고도 섬뜩한 미소를 통해 영화에 파열감을 더한다. 두 인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묘한 유대감은 영화가 선악의 단순한 이분법보다 복잡한 지점을 응시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말에서 모종의 가능성이 남지만 이는 긴 여정 끝에 간신히 손에 쥔 미열에 가깝다. 그럼에도 폭력과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시대적 폭압조차 말살하지 못한 생의 궤적이다. <바늘을 든 소녀>는 잊힌 역사의 여백을 비추며, 그 속에서 사라진 여성들의 자리를 되살린다. 제77회 칸영화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close-up

영화가 시작되면 등장인물들의 정면 표정이 중첩되며 엉키고 일그러진다. 검은 배경을 뒤로한 얼굴들 위로 흔들리는 명암만이 감정의 잔흔을 드러내고 공포, 피로, 침묵, 고통이 말없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인물들의 뒤틀린 관계를 예고하는 음험한 서문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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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폴>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 2019

전쟁 직후 레닌그라드의 폐허 속, 뇌진탕후증후군을 앓는 간호사 이야와 전쟁에서 돌아온 마샤의 어긋난 운명을 따라가는 영화다. <바늘을 든 소녀>가 흑백의 절제된 톤으로 억눌린 폭력을 은유한다면, <빈폴>은 붉은색과 초록색의 분명한 대비로 트라우마의 균열을 외화한다. 전쟁의 상흔과 시대의 압력이 여성들의 몸과 관계에 어떻게 침투하고 퇴적되며 변형되는지를 포착하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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