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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말 못 하게 만드는 실체에 대하여, <비밀일 수밖에>
최선 2025-09-10

누구나 말하지 못한 비밀을 품고 산다. 그 비밀이 언제,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관계가 무너질 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을 수도 있다. <비밀일 수밖에>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겨진 균열과 묻어둔 진실을 포착한 작품으로, 집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여러 인물이 머물게 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표면적으로는 결혼을 앞둔 두 집안의 만남이지만 이면에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와 감정이 켜켜이 자리한다. 김대환 감독은 가족이 가진 복잡한 감정을 탐색함과 동시에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건 무엇이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심각하거나 어둡지 않은 분위기로 웃음 포인트도 곳곳에 마련돼 있다. 휴직 중인 교사 정하(장영남)의 집에 예비 사돈 하영(박지아)과 문철(박지일)이 갑작스럽게 방문하면서 숨겨왔던 정하의 비밀이 폭로되는 이야기다. 비밀은 다름 아닌 정하의 성정체성이며, 정하는 애인 지선(옥지영)과 동거 중이다. 서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정하인데, 아들 진우(류경수)가 결혼을 앞두고 예비 사돈이 예정에 없던 방문을 하면서 긴장 상황이 시작된다. 사돈의 방문 후 처음에는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손님 대접을 하지만 차츰 정하가 묻어두었던 비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흔한 가정사 정도로 보이던 갈등은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한 것이며 예비 사돈 문철의 개입을 계기로 폭발하듯 터져나온다. 정하는 교사로서의 자리, 가족으로의 역할, 그리고 숨겨왔던 비밀의 무게 앞에서 흔들리지만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 분투한다. 오랫동안 붙들어온 비밀이기에 그걸 꺼내는 힘 역시 주인공에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은 비밀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주인공의 선택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다. 비밀을 만들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 포커스를 맞추려는 감독의 의도는 초면이나 다름없는 예비 사돈 문철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제한된 공간을 배경으로 인물들이 맞부딪치며 쌓아가는 감정을 잡아낸다. 집이라는 배경은 단순히 이야기를 담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심리적 거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러한 제한적 공간은 인물들의 감정 변화와 관계의 균열을 체감하도록 돕는다. 특히 정하의 비밀이 드러나는 과정은 폭발적이거나 극적인 방식이 아닌, 일상적 대화와 소소한 행동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도록 구성되었으며 비밀을 지닌 인물의 고통을 단순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탐색하려 노력한다.

의미 있는 시도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족이 모여 앉은 식탁, 사소한 대화, 예기치 못한 방문,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충돌하는 노력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요소를 통해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구나 가족 안에서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쯤은 품고 있기에, 영화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려 보낸다. <비밀일 수밖에>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묻기보다 말하지 못하게 만든 실체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내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close-up

예비 사돈 문철이 오랫동안 뵙지 못한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용기가 없어 집 앞 모퉁이에 숨어 머뭇거린다. 그때 시골집 문이 열리고 늙은 어머니가 빼꼼 밖을 내다보다 들어간다. 어수선하고 불안하던 정조를 일순 가르고 고요와 평온이 공간에 가득 찬다. 부모 이전에 자식이었던 문철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떠올린다.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버렸나. 여러 등장인물이 많은 말을 쏟아놓으며 전하려던 속내를 잠깐 내다보는 노인의 모습으로 온전히 전달한다. 빛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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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결혼하다> 감독 조너선 드미, 2009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던 킴(앤 해서웨이)이 레이첼(로즈마리 디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한집에 모인 가족과 하객 사이에 드러나는 오래된 상처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결혼식이라는 축제 무대에서 터져 나오는 애증과 고백을 그린 이 영화는 폭로를 다룬 <비밀일 수밖에>와 호응한다. 영원히 묻어둘 게 아니라면 레이첼 가족처럼 내장까지 보여줄 기세로 남김없이 쏟아내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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