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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악당도 영웅도 없는 곳에서, 이처럼 사소히 우직하기를, <3학년 2학기>
남선우 2025-09-03

경인하이텍과학고등학교 3학년 창우(유이하)는 자신이 없다. 남동공단에 자리한 M&H 엔지니어링에서 무사히 실습을 마치면 취업과 진학 기회가 주어질 텐데, 첫 사회생활은 걱정스럽기만 하다. “저를 좋게 봐줄까요?” 창우를 격려하는 선생님에게 되물을 만큼, 그는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보다 어떻게 비칠지를 더 우려한다. 반면 창우와 같은 공장에 배치된 우재(양지운)는 자신만만하다. 취직이 어려우면 해병대에 입대하면 된다고 말하는 그는 상사에게 혼나도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다. 화장실에 숨어들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려는 창우와 무엇에도 의지가 없어 보이는 우재 곁에는 먼저 M&H 엔지니어링에 다니고 있던 도제 실습생 성민(김성국)과 총무과 다혜(김소완)가 있다. 성민은 ‘에이스’로 불리며 학교와 회사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고, 다혜는 특유의 싹싹한 태도로 동료들과 잘 어우러진다. 그 틈에서 창우도 용접이라는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고, 가족에게 첫 월급 턱을 내면서 일하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간다. 막내가 먹고 싶어 한 브랜드의 치킨, 둘째가 원한 무선 이어폰을 챙긴 다음 자신의 취미인 기타 연주를 틈틈이 이어가면서.

하지만 일터는 창우가 일상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실습 담당 교사로 불리는 직원은 아이들을 귀찮아한다. 관리직 상사는 현장 노동자들의 부탁을 귓등으로 듣는다. 짐을 쉽게 나르기 위해 난간을 설치하지 않으면서 ‘위험한 일’은 외주를 준다고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외국인노동자, 고연령 노동자의 존재를 지우는 것도 부지기수다. 급기야 멀지 않은 곳에서 사고가 발생하자 창우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밟은 땅을 한번 두드려본다. 고민을 거쳐 각기 다른 선택지를 고른 현장 실습생들은 언젠가 자기 이름으로 바로 서는 성인이 되기만을 꿈꾼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소개돼 독립영화 팬들의 호응을 얻은 <3학년 2학기>가 조명하는 현실은 이런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히 나쁜 어른도, 특별히 착한 어른도 나오지 않는다. 물리칠 악당도, 승리할 영웅도 없다. 피로한 어른들만이 있을 뿐이다. 대신 이란희 감독의 카메라는 데뷔작 <휴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 충실한 노동자들의 뒤를 따른다. 이번 작품은 그중에서도 이제 막 노동 현장에 뛰어든 청년들을 둘러싼 환경이 어떤지 차근차근 제시하며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가늠하게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국회의원의 현수막에 적힌 “당신은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문구를 오래 응시하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는 그 끝에 특성화고등학교 출신들이 나아가는 여러 갈래의 삶을 보여준다. 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사소할지언정 우직한 요구도 들려준다. 정의는 그리 쉽게 웅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는 말해야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제스처가 <3학년 2학기> 를 단단히 매듭짓는다. 신예 유이하의 안정적인 호흡, 양지운과 김소완의 넉살 좋은 연기 등 젊은 배우들의 활약이 그 미더운 성장담으로의 몰입을 돕는다.

close-up

<3학년 2학기>의 주인공들은 수능시험을 치지 않았지만 여느 열아홉과 다르지 않은 자세로 스무살의 1월1일을 맞이한다. 카운트다운 끝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자마자 편의점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는 것만으로도 설레어하면서 말이다. <휴가>에서도 요리와 음식으로 인물을 챙기던 이란희 감독은 <3학년 2학기>에도 갖은 먹을거리로 영화의 정서를 배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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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 감독 정주리, 2022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는 특성화고 3학년생 소희(김시은)는 춤을 춘다. 그의 마지막을 추적하는 형사 유진(배두나)도 소희를 따라 동작을 취해본다. 정주리 감독은 어린 나이에 노동에 뛰어든 주인공에게 취미를 누릴 수 있는 평범함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란희 감독도 동감한 걸까. <3학년 2학기>의 창우는 기타를 친다. 공장에서 일하며 상처 입은 팔을 들어서라도 연주를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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