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직선으로 내리쬐는 작은 시골 마을. 함구증 증세를 보이는 초등학생 오노다 아키는 다른 친구들과 쉬이 섞이지 못한다. 어느 날 같은 반 소부에 료, 이노하라 유타와 장난스레 뒤섞이다가 고슴도치 같기도, 강아지 같기도 한 후레루를 마주한다. 후레루는 예부터 섬마을에 전해내려온 전설의 동물. 후레루만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 텔레파시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세 친구는 허물없이 빠르게 가까워졌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의 단층이 탄탄해졌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각기 다른 관심사와 취향이 생겨도 세 친구는 여전히 하나다.
그리고 이제 스무살. 섬마을을 떠나 도쿄에 상경한 이들은 기울어져가는 주택을 개조하여 함께 살아간다. 월셋집은 대도시를 부유하는 젊은이를 불안하게 하지만 내가 너고 네가 나 같은 단짝들은 동고동락하며 안정적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귀여운 후레루. 신비로운 의사소통 능력을 지닌 영물에게 세 친구는 삼시 세끼 맛있고 영양가 높은 사료를 먹이면서 애정으로 보살핀다. 이제 세 소년의 현실은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한다. 아키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전히 말하기 어려운 순간을 맞닥뜨리고, 료는 부동산 회사의 신입사원이다. 유타는 의상디자이너를 꿈꾸며 유명 패션스쿨을 다니지만 아무도 모르는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여느 날처럼 각자의 박자대로 일상이 흘러가던 어느 밤, 세 친구는 소매치기 당한 두 여성을 도와주다가 새 인연을 맺는다. 과거 유타와 같은 패션스쿨을 수료한 야사카와 나나,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당차게 쏟아내는 카모자와 주리. 그중 나나가 스토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두 여자가 안전하게 집을 구할 때까지 한집에서 같이 살기로 결정한다.
손만 닿으면 모든 생각을 편리하게 나누는 <후레루.>는 차라리 혼자가 될지언정 남들과 불편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현대인의 피로함에 온화한 상상력을 날카롭게 찌른다. 이들은 언어 없이도 계속해서 느슨한 소통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 오랜 믿음에도 균열이 생겨난다. 한집에 사는 남녀 5인은 자꾸만 어긋나는 연애 감정으로 분노와 질투, 말싸움과 눈치 보기 등 복잡한 감정에 뒤덮인다. 그리고 마침내 후레루의 진실을 목도한다. 후레루를 통한 텔레파시에서는 마찰을 일으킬 불평불만이 자체적으로 제거된다는 것이다. 료의 말마따나 악플이 알아서 삭제 처리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부터 세 친구의 우정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마음과 완벽하게 일치해온 친구들이라 생각했는데. 불평을 일절 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이라 믿어왔는데. 부정적인 생각이 후레루에 의해 차단된 것이라면 그동안 그들이 쌓아온 건 진짜 우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워진 세 친구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후레루.>는 상황적 모순에 의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하면서 소통과 대화의 진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다만 세 친구를 성장시키기 위한 구태의연한 이성애적 위기나 여성 캐릭터 나나와 주리에 대한 편협한 묘사, 스토킹 위협을 두고 피해자를 탓하는 대사 등이 튀어나온 나무뿌리처럼 자꾸만 발을 건다.
close-up
생각이 현실이 되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세 친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하늘을 나는 것이다. 솜사탕 구름에 통통 튕기면서. 섬마을에서 자연과 가까이 지내던 소년들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묻어나는 장면이다.
check this movie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감독 나가이 다쓰유키, 2013
나가이 다쓰유키 감독, 다나카 마사요시 캐릭터 디자이너, 오카다 마리 각본가 3인이 한몸이 되어 작업한 첫 번째 영화. 이외에도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가 있으며 가장 최근작이 바로 <후레루.>다. 전작을 통해 삼총사의 세계관을 지도처럼 따라가기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