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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워진 이름과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담대한 귀환, <케이 넘버>

1970년대 초,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미오카 밀러(한국명 김미옥)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왔지만 그 시도는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수십년 전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고, 입양 과정에서 남겨진 서류들은 불완전하거나 접근 불가했다. 그런 미오카가 마지막 희망을 품게 된 것은 ‘배냇’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면서였다. 해외 입양인의 뿌리 찾기를 돕는 한국인 여성 모임 배냇은 미오카의 고된 여정에 함께하고, 미오카의 든든한 동행자가 되어준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해묵은 서류를 뒤지고 옛 얼굴이 담긴 전단을 돌리는 것 이상의 고난이 그들 앞에 펼쳐진다. 해외 입양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어두운 현실을 되돌아보는 영화 <케이 넘버>는 한국 문화를 긍정적 뉘앙스로 일컫는 ‘케이’(K)라는 접두어 뒤에 부끄러운 과거의 상징을 더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진실을 대면하게 만든다.

‘케이 넘버’(K-Number)는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번호다. 개인의 정체성을 숨기는 숫자화되고 물질화된 기표다. 6·25전쟁 이후 한국은 세계 최대 입양 국가가 되었고, 지금까지 약 20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해외로 보내졌다. 그 과정에서 양부모가 한국에 오지 않아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일명 ‘대리입양’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통해 정부와 기관은 아이들을 ‘수출’했고, 그 대가로 막대한 수수료를 챙겼다. 아이들은 사고파는 물건처럼 순식간에 거래되고 서류 속 번호로 기록되었고, 그 기록조차 조작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였다. 다큐멘터리 <물물교환>(2015) 등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와 연대를 조명해온 조세영 감독이 연출을 맡아 사회적 무관심과 폭력 속에 방치된 해외 입양인들의 삶을 ‘로드무비’의 형식으로 좇는다.

정체성 혼란 같은 정신적 고뇌는 물론 각종 사회·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입양인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로서 특별히 새롭다고 할 순 없는 소재다. 그러나 해당 소재로 된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곧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그 문제를 해결하지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차분하고 성실하게, 냉철하고 섬세하게 입양인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들의 문제가 ‘그들’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곧 ‘우리’의 문제임을 환기한다. 미오카와 배냇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과거의 기록을 뒤지고 감춰진 역사를 파헤친다. 여기서 역사란, 단순히 미오카 개인의 역사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기구한 사연이 개인의 불운이 아닌 구조적 문제의 산물임이 드러날 때, 관객은 충격적인 역사의 단면을 마주하게 된다.

조세영 감독은 분노나 슬픔을 극단적으로 호소하지 않고도 진정한 울림을 자아낸다. 대상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입양인의 시선에서 비친 한국 사회를 낱낱이 드러내고, 우리가 몰랐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직면하게 한다. “한국에서 시작했으니 한국에서 끝내야 한다”라는 영화 속 말처럼 ‘돌아온 아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과거의 해묵은 감정 이상의 미래를 향한 물음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하는 다큐멘터리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

close-up

“한국인의 몇 퍼센트가 수십년간의 해외 입양에 대해 알고 있는 거 같아요?” 영화는 후반부에서 미오카, 즉 김미옥의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기록으로 되돌아온다. ‘남대문서’, ‘독쟁이’ 등의 글씨가 흐릿하게 남겨져 있다. 영화는 남대문경찰서와 서울역의 전경을 비춘 뒤, 다시 한번 가족 찾기에 실패한 미오카의 쓸쓸하고도 담대한 얼굴을 비춘다. 한때 세계 최대 입양국가에서 이제는 세계 1위 저출산 국가가 된 한국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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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겟 미 낫: 엄마에게 쓰는 편지>, 감독 신선희, 2021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또 다른 영화, <포겟 미 낫: 엄마에게 쓰는 편지>는 생후 4개월 만에 덴마크로 입양된 선희 엥겔스토프(한국명 신선희)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다. 친모를 찾으러 한국의 미혼모 보호시설을 찾은 감독은 아기들의 입양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엄마가 왜 나를 포기했는지 알고 싶어” 만든 영화는 한국 미혼모들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이국으로 입양보내진 감독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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