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을 읽으면서 한번쯤 책의 내용뿐 아니라 종이의 색과 질감, 삽화와 폰트, 가름끈과 띠지의 조화 등 본연의 디자인에 매료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목할 만한 영화가 개봉한다. 50여년간 1만5천여권의 책 표지를 디자인해온 일본의 ‘명장’ 북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작업 현장과 일상을 근거리에서 포착하는 다큐멘터리 <책 종이 가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제작에 참여한 바 있는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연출작으로, 기쿠치 노부요시의 디자인처럼 군더더기 없는 담백하고 깔끔한 연출이 돋보인다.
종이책의 소멸이 당연하게 예고되는 디지털 시대에 기쿠치 노부요시는 (영화의 제목에서 예상 가능하듯) 종이를 가위로 오려서 풀로 붙이는, 다소 번거로운 ‘수작업’을 고수한다. 이것만으로도 가히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을 대표할 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아날로그적 도구의 사용만이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그의 작품 세계를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타이포그래피의 1mm 차이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타고난 감각과 꾸준한 고민을 기반으로 다채로운 색감과 질감을 배합하며, 때론 독특한 개념적 설계를 시도하는 그의 치열한 작업 과정이 감탄을 자아낸다. 기쿠치 노부요시가 편집자와의 협업을 통해 저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디자인을 완성하는 과정은 감독이 다양한 영화적 요소로 자신만의 미장센을 구성하는 것과도 같다.
“장르를 불문하고 종이책은 소설의 ‘몸’이에요. 소설이라는 산물의 몸이 종이책인 거죠.” “여러 조건을 극복하는 게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만드는 건 내가 하지만 타인 없이는 성립이 안돼. 디자인도 타인을 위한 거야.” “말은 역사와 독창성을 가진 생명체와 같아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호흡의 영화에 이따금 기쿠치 노부요시의 문장이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 북 디자이너이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책이나 저자와 얽힌 기쿠치 노부요시의 사연 또한 흥미로운데, 20대 때 운명처럼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을 접하고 북 디자이너를 꿈꾸게 된 그가 노년의 디자이너가 되어 블랑쇼의 책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되는 장면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