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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개봉작 나는 비디오
2002-01-03

영화광 3인이 새로 찾은 내맘대로 명작 컬렉션

모두가 휘황한 개봉작에 열광할 때, 동네 비디오숍에서 보석같이 반짝이는 나만의 영화를 발굴해내는 작은 기쁨은 진짜 영화광들만이 누리는 즐거움일 것이다. 여기 3인의 필자가 각자의 개성으로 고른 비디오 목록을 공개한다. B급영화가 건드리는 짜릿한 쾌락의 코드에 전율하며, 아깝게 잊혀진 명작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돌아보며, 삶의 질곡을 따라가는 드라마에 울고 웃으며 긴 겨울밤을 함께 하자. 편집자

part1 김봉석이 뽑은 B급영화

싸구려, 즐겁고 정정당당한 소위 말하는 B급영화들을 제일 많이 봤던 때는, 80년대 후반이다. 딱히 좋아해서 본 건 아니다. 당시는 메이저 영화들이 별로 없었다. CIC나 워너에서 한달에 큰 영화를 기껏해야 3, 4편 정도 출시하던 시절이다. 그걸 다 보고 나면, 비디오가게 순례가 시작된다. 일단 한 가게에 들어가 가게 전체를 샅샅이 뒤지면서 제목을 보고, 재킷을 본다. 감독이나 배우 중에서 혹시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다면 좀 쉽다. 낯익은 이름이 어디에도 없을 때는 줄거리와 사진을 참조한다. 하지만 줄거리와 사진에도 사기가 많다. 그렇게 마이너 영화를 고르면, 성공확률이 한 1/4 정도 된다. 아주 재미있다, 가 아니라 그럭저럭 볼 만하다는 영화가.

그 ‘쓰레기’들 틈에서 보석을 건지는 확률은 1/10이 채 안 되지만, 그렇게 B급영화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일은 쏠쏠한 재미가 있다. 한정된 조건에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서 보물을 찾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보물섬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어릴 때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 요즘은 그런 재미가 없다. 비디오가게에 잘 가지도 않고, 간다 해도 뒤지기는커녕 몇 군데만 죽 훑어보고 빨리 고른다. 아니 그보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특정의 영화를 빌리러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의외의 발견을 하는 기쁨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걸 되돌리는 방법은 역시, 사소한 발견의 즐거움을 다시 맛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별 기대없이 보기 시작한 영화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면서(그러나 한 가지 주의점. B급영화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취향에는 동조하지만, 다른 파장에는 절대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구역질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학지연 虐之戀

감독 종소웅 주연 이수현, 이미봉 , 황추생 제작연도 1993년 출시사 시네마트

<학지연>의 포인트는 <첩혈쌍웅>의 이수현이 아니라, 악인으로 나온 황추생이다.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수상자인 황추생은 출중한 연기력으로 홍콩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린 독특한 배우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을 연기한 적도 거의 없는 황추생이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학지연>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황추생의 캐릭터는 홍콩영화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이 아니다. <학지연>의 캐릭터 제니는 완벽한 사이코다. 어린 시절 돈으로 사다시피한 아내 아옥을 늘 구타하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의심한다. 아옥을 때리다가 경찰에 끌려가도, 오히려 경찰을 협박한다. 자신의 뒤틀린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서, 제니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성적 학대와 폭력을 집요하게 보여준 <학지연>은 황추생이라는 배우가 없다면, 정말 싸구려다. 그러나 황추생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절로 소름이 돋는다.

황추생의 최고작은 금마장 남우주연상을 탄 <인육만두>(<언톨드 스토리>란 제목으로 예전에 국내에서 출시된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다. 사람 고기로 만두를 만드는 <인육만두>에서 음식점을 차지하려고 일가족을 죽이고, 그걸 눈치채는 사람까지 모두 죽여버린다. 그리고 태연하게 고기만두를 만들어, 수사를 나온 경찰들에게 먹인다. 아이들까지 칼질을 하는 장면이나, 도착적으로 여종업원을 폭행하는 장면에서 황추생의 살기어린 눈을 보면 정말 섬뜩하다. <학지연>은 <인육만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황추생의 지독한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황추생의 본색을 만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지연>은 추천작이다.

케이조쿠 ケイゾク

감독 쓰쓰미 유키히코 출연 나카타미 미키, 와타베 아쓰로 제작연도 2000년 출시사 스타맥스

<케이조쿠>는 <춤추는 대수사선>이나 <X파일>처럼 TV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은 뒤, 극장용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케이조쿠’는 불가사의한 사건이나 도저히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사건만을 수사하는 경찰 내의 특수부서를 말한다. 혹시 일본의 <X파일>? 그런 생각으로 화면을 쳐다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뭔가 멋진 광경이 등장해서 긴장하고 있으면, 느닷없이 뒤통수를 친다. ‘케이조쿠’를 이끌었던 노노무라 계장은 정년퇴직 뒤 퇴직금으로 부인과 이혼하고, 사귀던 여고생과 행복한 노년을 보낼 꿈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상부에서는 퇴직금을 줄이기 위해 노노무라를 강등시킨 뒤 내쫓아버린다. <케이조쿠>는 이런 식의 만화적인 발상과 전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속출한다.

노노무라 계장의 후임은 젊은 여성 시바타 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역시 하는 짓마다 어처구니가 없다. 시바타가 부임한 날, 묘한 사건의 의뢰가 들어온다. 15년 전 침몰한 배의 생존자들을, 일본의 버뮤다로 불리는 ‘액신섬’으로 초대하는 초청장이 온 것이다. 발신인은 당시 부모를 잃고 홀로 성장한 딸 나나미다. 나나미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게임을 제안한다. 그 순서대로 죽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뒤 성에서 추락한 여인의 시체가 사라지고, 방이 통째로 사라지는 등 섬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케이조쿠>는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에서 익숙한 추리의 과정이 펼쳐지는데, 사건 해결보다는 그 황당한 인물들간의 개인기가 훨씬 재미있다. 우리는 그런 걸 만화적이라고 부르지만, 이제는 모든 장르에 걸친 엽기적인 웃음의 코드가 됐다. TV시리즈에서 복잡하게 펼쳐진 관계를 수습하느라 처음 본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후반부는 지루하지만, <케이조쿠>는 봐둘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왜 인기를 끌었을까, 를 상상하면 시대의 변화가 보인다.

의혹의 침입자 Opera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출연 크리스티나 마실라치, 우바노 바버리니 제작연도 1987년 출시사 트러스트

공포를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페라의 유령>을 난삽하게 비튼 다리오 아르젠토의 <의혹의 침입자>에는 끔찍한 장면이 등장한다. 여자를 붙잡아 무대 위에 묶어놓고, 그 앞에서 살인을 시연한다. 여자는 그것을 봐야만 한다. 눈을 감으라고? 천만에 살인마는 이미 그녀의 눈꺼풀을 꿰매놓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도록. <의혹의 침입자>는 고상하면서도 잔인한 다리오 아르젠토의 유럽적인 감수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공포의 이블 데드 Necronomicon

감독 크리스토프 강스, 가네코 슈스케, 브라이언 유즈나 출연 제프리 콤스, 토니 아지토, 후안 페르난데스 제작연도 1994년 출시사 영화나라

고딕소설 이후 현대 공포소설을 창조한 작가로는 20세기 초에 활약했던 H. P. 러브크래프트가 꼽힌다. <지옥인간> <좀비오> 등의 원작을 제공했던 러브크래프트는 옴니버스 영화 <공포의 이블 데드>에서 화자로 등장한다. 우연히 ‘사악한 비밀’이 담겨 있는 책 <네크로노미콘>을 발견한 러브크래프트는 관객에게 책 속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라이언 유즈나는 자신의 장기인 극심하게 변형되는 신체를 여전히 선보이고, 영화 전체는 ‘하드 고어’로 점철되어 있다. 주목할 이름은 일본의 가네코 슈스케. <가메라> 시리즈를 부활시킨 가네코 슈스케는 공포영화에서도 발군의 재능을 과시한다.

이완 맥그리거의 마틴 Nightwatch

감독 올레 보르네달 출연 이완 맥그리거, 닉 놀테, 조시 브롤린, 패트리샤 아퀘트 제작연도 1998년 출시사 쉘부르 필름

<오픈 유어 아이즈>를 미국에서 <바닐라 스카이>로 리메이크하자 지루해진 것처럼, <이완 맥그리거의 마틴>도 맥이 빠진다. 올레 보르네달이 94년 덴마크에서 <Nattevagten>이란 제목으로 만들었던 이 영화는, 시체 보관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살인과 사체 강간범으로 몰린 청년의 이야기다. 94년작은 깔끔한 스릴러물이지만, 할리우드판은 악취미만 가득한 범작으로 몰락했다. 하지만 B급영화는 그래도 벗어날 구석이 있다. <이완 맥그리거의 마틴>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갖가지 악취미로 가득하다. 지루하게 보고 나면, 그것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각본은 분명 독특하다.

내 차 봤냐? Dude, Where’s My Car?

감독 대니 레이너 출연 숀 윌리엄 스콧, 애슈톤 커쳐 제작연도 2000년 출시사 폭스

<내 차 봤냐?>는 순진무구한 두 남자아이의 즐거운 모험을 그린 영화다. <크레이지 핸드>의 판타지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느날 아침 깨어보니 차가 사라졌다. 차를 찾아 헤매다보니 어제 밤에 그들이 뭔가 대단한 일을 했던 것만 같다. 타조도 만나고, 외계인에게 쫓기기도 하고, 킹콩처럼 도시를 짓밟는 거대 여인과 싸우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트리거 이펙트 The Trigger Effect

감독 데이비드 코엡 출연 엘리자베스 슈, 더모트 멀로니, 카일 맥라클런 제작연도 1996년 출시사 CIC

<쥬라기 공원>의 시나리오 작가 데이비드 코엡의 데뷔작 <트리거 이펙트>는 진지하게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다. 금요일의 대도시는 갑작스런 정전으로 혼란에 빠진다. 전기가 사라진 채 며칠이 흐르자 사람들은 ‘본성’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무엇일까. <스터 오브 에코>에서 안정된 연출을 과시했던 데이비드 코엡은, 데뷔작에서도 묵중한 주제를 뚝심있게 다룬다.

사이버시티 오에도 808 Cybercity OEDO 808,

감독 가와지리 요시아키 제작연도 1990 출시사 유림

<무사 쥬베이>의 가와지리 요시아키는 액션 연출에서 일가견을 보이는 감독이다. <마계도시> <신세기 렌즈맨> 등 몇 작품이 출시되어 있는데 그중 <사이버시티 오에도 808>는 주목할 만하다. 정부에서는 중범죄를 다루는 특별부대원으로 죄수들을 선발한다. 임무에 실패하면 바로 목걸이의 소형폭탄이 터져 사형이 집행된다. 일본적인 감성과 ‘사이버 펑크’의 완숙한 조율이 인상적인 <사이버시티 오에도 808>은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기계, 영생을 약속하는 우주의 뱀파이어 등 ‘사이버 펑크’의 유행을 충실하게 다르고 있다. 미국 애니메이션의 영향도 엿보인다.

고질라 2000 Godzilla 2000: Millennium

감독 오카와라 다카오 출연 무라타 다케히로, 니시다 나오미, 스즈키 마유, 아베 히로시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새롬

<고질라 2000>을 B급영화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고질라를 본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고질라다!’라고 외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많은 제작비를 들이건 ‘고질라’의 본질은 싸구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극히 정형화된 관습에 따라 아주 조금씩만 변화했던 <고질라> 시리즈는, 보지 않고는 그 본질을 알 수 없다. 보는 순간에 동참하거나, 유치하다고 자리를 박차게 만드는 지극히 단순한 영화. <고질라 2000>은 졸작이지만, 고질라를 보는 것만으로 즐겁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 Baby Cart at the River Styx

감독 미스미 겐지 출연 와카야마 도미사부로, 도미카와 아키히로 제작연도 1972년 출시사 아이비젼

<아들을 동반한 검객>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이다. 제작연도는 그로부터도 10여년 전인 1972년. 당시에 충격적이었던 <아들을 동반한 검객>은 지금 봐도 여전히 시원스럽다. 72년에 무려 4편이 만들어진 <아들을 동반한 검객>은 인상적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에피소드를 펼쳐가며 시리즈를 양산하는 V시네마의 선조를 보는 느낌이다. 호쾌한 액션만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정정당당한 싸구려 영화.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part1 김봉석이 뽑은 B급영화

▶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 part3 손원평이 사랑하는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