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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 | 부천초이스 (Puchon Choice)
2001-07-05

아홉 나라에서 온 아홉개의 판타지, 레이스를 벌이다.

죽어버려, 날

지루하게 하지 말고!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

Tears of the Black Tiger

타이|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엥| 100분| 2001년

상류층인

룸포이의 가정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방콕을 피해 수판부리라는 시골로 들어간다. 둠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 준다. 도시처녀 룸포이와

수줍은 시골 소년 둠은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9년 뒤 그들은 방콕의 대학생으로 다시 만난다. 둠은 룸포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대학에서 쫓겨나지만 열심히 돈을 벌어 다시 그녀와 만나 결혼할 것을 약속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둠은 아버지가 도적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을 알게 된다. 둠은 복수에 불타는 갱스터가 된다. ‘블랙 타이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둠. 조직 속에서의 배신과 암투 속에서

사랑을 지키려는 둠의 운명은 점점 비극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티어스 오브 더 블랙 타이거>의 복고풍 색채는 의도적으로 화려하게 채색한

세트 사용과 필름을 베타테이프로 옮긴 뒤 후반작업을 통해 색을 덧입힘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위시트 사사나티엥은 여기에다 60년대식 타이영화의

전통과 연극무대의 차용으로 타이식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불릴 만한 독특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히어로즈 인 러브

戀愛起義

홍콩·중국| 감독 윙쉬야, 사정봉, 풍덕륜외| 출연 샬린 초이, 로렌스 초우| 85분| 2001년

<히어로즈 인 러브>는 네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다. 각 에피소드들은 다소 실험적인 연출스타일을 지닌다.

<히어로즈 인 러브>는 오늘날 홍콩영화의 영역을 확장해 보려는 새로운 시도라 할 만하다. 1부 ‘유괴’는 윙쉬야가 감독한 20분짜리

레즈비언영화. 관습적이지 않은 스타일이 돋보인다. 2부 ‘내 사랑’은 대중의 우상인 니콜라스 체(사정봉)와 스티븐 펑(풍덕륜)이 감독을 맡아

관객의 관심을 끈다. 총을 사랑하는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 약간은 아마추어적인 24분간의 에피소드. 3부 ‘Oh G!’는 디스크자키인 GC

구바이가 연출한 에피소드로 가장 관습적인 내러티브를 지니는 모던하고 도시적인 첫사랑 이야기다. 주연 샬린 초이와 로렌스 초우 모두 신인으로,

자연스럽고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다. 마지막 4부는 ‘TBC’란 제목의 5분짜리 에피소드로, 제작자인 잔 람브(Jan Lamb)가 감독. 세

에피소드를 연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히어로즈 인 러브>의 각 에피소드들이 결핍하고 있는 깊이를 보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나비

The Butterfly

한국| 문승욱| 김호정, 강혜정| 106분| 2001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이건 자기 살해의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나비>의 한국계 독일인 안나에겐 기억이 죽음 같아서 자살과 완전한

망각 외엔 출구가 없다. 다행히 <나비>의 무대인 가까운 미래의 서울엔 망각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고, 영리한 장사꾼들은 망각 바이러스를 찾아

떠나는 패키지 여행상품까지 마련해두었다. 독일에서 온 안나를 가이드 유키와 운전사 K가 맞는다. 납중독자인 유키는 의사의 심각한 경고에도 7개월된

아기를 지우지 않았다. 과거를 잃어버린 K는 기억을 찾아줄 친지를 찾고 있다. 망각의 바이러스를 나비가 인도하며, 나비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지독한 산성비가 내린다. 세 사람의 젖은 겨울옷 같은 여정이 시작된다. <이방인>으로 장편 데뷔한 문승욱 감독은 6mm 디지털카메라에 2000년

서울의 모습 그대로를 온기없는 미래공간으로 담는다. 때론 씻어내야 할 독과 한기로, 때론 양수처럼 따뜻한 보금자리로, 때론 고통스런 영적 세척제로

탈바꿈하는 물의 유동하는 이미지에 실려, 이 낯설고 낯익은 공간은 어느새 보는 사람의 어두운 기억에 더운 손을 내민다. 뛰어난 연극배우였던

김호정(안나 역)의 깊은 눈매는 여배우가 미모와 관능을 치장하지 않고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음을 새삼스레 수긍케 한다. 동기화는 빈곤하지만

<나비>는 섬세하게 포착되고 편집된 화면 곳곳에 묻어 있는, 만든 이의 진심을 외면하기 힘든 영화다.

커먼 웰쓰 Common

Wealth

스페인| 감독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출연 카르멘 마우라| 104분| 2000년

퇴직한 남편을 내심 답답해 하며 욕구불만에 빠져 있는 부동산 중개인 훌리아. 거래 매물인 고급 아파트에서 몰래 만찬을 즐기며 우울한 생활에

낙을 만들어보려던 그녀는, 주인이 죽은 이웃 아파트에서 우연히 300만달러를 발견한다. 그러나 문제의 아파트 주민들은 <악령의 씨>의

이웃과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의 승객 못지않은 가공할 결속력을 자랑하는 집단. ‘공공의 복지’, 아니 ‘공공의 재산’을 뜨내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민들은 돈가방을 든 훌리아와 필사의 추격전을 벌인다. 임자없는 돈뭉텅이를 둘러싼 설정은 <쉘로우 그레이브>와

비슷하지만, <야수의 날> <액션 무탕트>의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은 <커먼 웰쓰>를 암울하면서도 통쾌한

스페인풍 블랙코미디로 완성했다. “그냥 죽여라, 날 지루하게 만들지 말고!” 같은 대사가 자연스러운. 쇼크와 스릴을 살리면서도 집단 신경증과

괴짜 인물들의 개성, 부부간의 미묘한 심리를 모두 소홀함 없이 묘사한 <커먼 웰쓰>는 입가에선 웃음이 삐져나오고 팔뚝에서는 소름이

돋는 영화다.

호텔 스플렌디드 Hotel Splendide

영국-프랑스| 감독 테렌스 그로스| 출연 토니 콜레트, 다니엘 크레이그| 95분| 2000년

정상성의 세계로부터 동떨어져 안으로 밀폐된 자족적 소우주는 판타지영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세팅이다. <호텔 스플렌디드>는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 못지않게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남자가 관리하는 외딴 섬의 불건강한 호텔에서 벌어지는 드라마. 엄격한 규칙과 맛없는 메뉴,

진흙 목욕요법을 고집하는 블랑쉐 가족이 경영하는 호텔 스플렌디드에서는 투숙객도 범상치 않다. 물을 겁내는 스탠리, 온몸을 배트맨 같은 옷으로

가리고 사는 과민 피부의 소유자 세르게이는 탈출을 꿈꾸나 매번 실패한다. 그러나 죽은 창업자 블랑쉐 부인에게 해고됐던 요리사 캐스가 돌아와

생기있는 요리를 식탁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호텔은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이낏빛 고딕 건축물과 생물처럼 신음하는 파이프들도 등장인물

못지않은 연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각각의 장면은 주네와 카로의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테마면에서는 <초콜렛>의 맛을

떠올리게 한다. 결말부에는 떠들썩한 체크아웃이 기다리고 있다.

뉴질랜드 이불 도난 사건 Price of Milk

뉴질랜드| 감독 해리 싱클레어| 출연 다니엘 코맥, 칼 어반| 87분| 2000년

우유가 버터가 되도록 사랑을 나누는 젖소농장의 두 연인 루신다와 롭의 달콤한 약혼 밀월은 소심한 루신다가 연인의 애정을 무리한 방법으로 시험하던

날부터 균열을 일으키고 루신다가 애지중지하던 퀼트 이불을 도둑맞은 날부터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차에 치일 뻔한 마오리족 할머니의 집에서

사라진 퀼트를 발견한 루신다는 이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그 대가로 롭의 사랑을 어려운 시험에 들게 하고, 루신다의 단짝친구까지 연적으로

돌변한다. 여기서 ‘철없는 약혼녀’ 루신다의 이야기는 인어공주와 신데렐라의 슬픔을 빌려온 현대의 동화로 탈바꿈한다. 남미가 아닌 뉴질랜드를

무대로 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연애담 <뉴질랜드 이불 도난 사건>은 지난 부천영화제에서 인기를 끌었던 <시암 선셋>처럼

바보스럽지만 자꾸 정이 가는 로맨틱코미디. 모스크바 오케스트라의 언밸런스한 음악도 영화의 엉뚱한 분위기를 부추긴다. 광장공포증 때문에 종이

상자를 한사코 쓰고 다니는 수줍은 강아지는 보기 드물게 기발하고 사랑스러운 조연.

시체유기 자장가 3 Chinesen Mit dem Kontrabass

독일| 감독 클라우스 크래머| 출연 보리스 알지노빅, 클라우디아 미켈센| 88분| 1999년

필름이 끊긴 사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혼성 트리오의 시체유기 소동극인 이 영화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여자친구의 시체를 발견한

소심한 마마보이 건축사 폴과 그의 충실한 두 단짝친구가 겪는 수난의 희극이다. 폴이 창업한 회사의 첫 수주를 자축하는 동안, 애인 가비는 다른

남자를 아파트에 끌어들였다가 남자의 스텝이 엉키는 바람에 가구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즉사한다. 숙취에서 깨어난 폴은 자기가 죽였을지도 모르는

가비의 시신에 기겁해 의사인 친구 막스의 도움을 청하고 둘은 톱, 믹서, 냉장고, 수세식 변기 등 가재도구를 용도변경해 시체 없애기(?)에

나선다. 여러모로 부천영화제 초청작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와 비슷한 설계도를 가진 이 영화에서도, 눈치없는 가족과 이웃이 무시로

들이닥쳐 주인공들의 애를 태운다. 독일의 유명 코미디배우들이 분한 주인공 삼인조는 “(광우병 때문에) 요즘 고기는 믿을 수 있어야죠”라는 대사를

읊거나 노래 <마이 걸>이 흐르는 가운데 연인의 뼛가루를 도시 곳곳에 뿌리고 다니며 폭소를 자아낸다.

공포의 집 House on Terror Tract

미국| 감독 랜스 W.드레슨, 클린트 허치슨| 출연 존 리터, 데이비드 들루이즈| 97분| 2000년

<어메이징 스토리>류의 옴니버스 구성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식을 취한 교외 괴담. 겉보기엔 평화로운 중산층 주거지로 신혼부부를 안내하는

부동산 중개인 봅 카터는 얼핏 쾌활해 보이지만 실은 성과급제를 택한 회사로부터 시달리는 절박한 처지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근사한 세채의

집은 저마다 도저히 팔리기 힘든 기괴한 내력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집은 아내의 정사를 덮치기 위해 함정을 놓았다가 죽음을 맞은 남편과 그

혼령의 믿기 힘든 복수담의 현장이고, 두 번째 집은 외동딸의 사랑을 앗아간 사악한 원숭이와 혈투를 벌이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살았던 곳이다.

세 번째 집에는 노파 가면을 쓴 살인자의 범죄를 예지하는 한 청년과 그를 상담한 여의사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순진한 ‘아메리칸

드림’을 조롱하는 내용이지만 그보다 “뭔가 좋은 것을 가지려면 그것의 역사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많은 행복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신경쓰는 건 한번의 불행뿐”이라는 주인공의 투덜거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

턴 The Turn

일본| 감독 히라야마 히데유키| 출연 미추코 바이쇼, 리호 마키세| 111분| 일본

모래시계 모양 로고와 ‘시간’이라 명명된 동판화로 시작되는 <>은 <사랑의 블랙홀>의 아이디어와 <동감> <프리퀀시>의 정서,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영영 분리된 <러브레터>의 아득한 단절감이 어우러진 영화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판화를 제작하는 아가씨 마키는 대형 교통사고를 겪은 순간,

사고 직전인 오후 2시15분을 기점으로 영원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다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고 날씨도 그대로인 텅 빈 세계에서 절대고독과

싸우던 마키는 어느날 ‘저쪽 세상’에서 걸려온 청년의 전화를 통해 현실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끈을 갖게 되고 현실의 자신이 혼수상태임을 알게

된다. 다른 우주에 속한 두 남녀가 전망좋은 레스토랑에서 ‘여행자’를 지켜준다는 식물원의 나무 앞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와 만나는 삽화들이

무척 예쁜 <>은 순정만화의 향기를 낸다. 그러나 진공의 세계에 홀로 남겨진 채 시간을 지워나가며 문득문득 영원한 미아가 되는 공포에 가위눌리는

마키의 상황 자체는 꽤 넓은 폭을 지닌 은유이기도 하다.

허문영 기자 김혜리 기자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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