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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금전 | 황홀했던 추억과의 재회
2001-06-29

프린트 소재확인에서 카탈로그 작성까지, 회고전 준비과정

김영덕/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래머

호금전에 대해 말하자면 꼭 얘기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70년대에 중고교 시절을 보냈고 대구 시민극장, 오스카극장 등을

돌아다니며 홍콩영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압도하는 스펙터클, 누추하고 갑갑한 현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 영웅의 세계. 그는 실현할

수 없는 이상을 사진과 포스터를 모으는 것으로 대신하려 했다. 어느날, 그가 모아온 수백점의 사진과 영화포스터(그 얇은 지질이란!)가 모조리

불살라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아들의 이상한 취미 때문에 쌓여가는 종이더미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가 어른이 되고 직업을

갖게 되는 20여년 동안의 과정에서 비디오가 보급되었고, 그는 이제 비디오 수집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홍콩, 싱가포르를 여행하며 사모은

자료들로 그는 불법 사설 쇼브라더스 라이브러리를 완성하였다.

나 의 영 웅, 호 금

호금전은 무협영화의 아버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파(新派)무협영화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완성시킨 무협영화의 고수다. 67년작

<용문객잔>(龍門客棧)은 68년 <용문의 결투>란 제목으로 한국에 수입, 배급되었고 그해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물론

홍콩 내에서도 흥행 1위자리를 고수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이 영화를 보면 서극이나 리안의 스타일이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확연히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보다 한해 전에 그는 쇼브라더스에서 <대취협>(大醉俠)을 만든다. 이는 67년 <방랑의 결투>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 최초로 수입된 홍콩 무협영화였다. 당시 <방랑의 결투>나 <용문의 결투> 신문광고

문구는 이러하다. “日本사무라이映畵를 斷然 능가하는 劍術映畵의 金字塔!”, “續 ‘放浪의 決鬪’ 사무라이 映畵를 完全制壓!” 이처럼 당시 사무라이영화가

유행하던 때에 그의 영화가 보여준 새로움과 충격은 홍콩을 넘어서서 한국 땅에까지 전파되었다. 이후 한국에는 <충렬도>(忠烈圖),

<천하제일>(天下第一), <산중전기>(山中傳奇), <공산영우>(空山靈雨) 등의 영화들이 소개되었다. <산중전기>와

<공산영우>는 한국의 불국사, 가야산, 속리산 등지에서 촬영했을 뿐 아니라 우성칼라라보에서 현상되었다. <산중전기>는

한국어 더빙판으로 상영되었다. 사실 합작영화인 셈이다.

다시 서두에서 꺼낸 그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70년대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늘 그와 함께 행복한 홍콩영화 보기의 경험을 공유했었다. 과거의 사소한

경험이 오늘날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들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은,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걸작이고

거장이라 하는 것도 결국 세월이 흘러 새롭게 발견하면서 붙여지는 이름인 것 같다. 언젠가 그가 그렇게 갈망해오던 호금전의 영화를 커다란 스크린에서

영사되는 온전한 영화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했는데,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와호장룡>의 성공은 호금전을 새롭게 조명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어 린 날 의 매 혹 을 현 실 로 불 러 내 다

지난 2월, 호금전 회고전을 해보자는 얘기가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들과의 회의에서 대두되었을 때, 내심 기뻐하면서도 몇 개월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판권이나 프린트 소재들을 찾아내 제대로 된 회고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걱정도 되었다. 우선 그간 관계를 맺어왔던 여러 아시아영화

관련자들에게 회고전 계획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지난해 홍콩에서 만났던 스티븐 크레민(아시아필름라이브러리 운영자)은 매우 성실한 답변을 보내왔다.

98년 홍콩에서 있었던 제22회 홍콩영화제 회고전 카탈로그를 보내왔고, 호금전에 대해 글을 써줄 만한 연구자들 몇명을 추천해주었다. 홍콩 필름아카이브와

차이니스타이베이 필름아카이브에서도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호금전 작품들의 목록과 판권소유자들의 연락처를 보내주었다. 이 두 아카이브는 호금전에

대해 가장 많은 프린트를 보유하고 있다. 새롭게 복원된 <충렬도>의 프린트는 홍콩에서 빌릴 수 있게 되었고 <용문객잔>

<영춘각의 풍파> <천하제일> <희로애락> <산중전기, <공산영우> <협녀>의 프린트가

타이베이에 있다는 반가운 연락도 왔다. <충렬도>와 함께 우리는 호금전이 한국에서 찍었던 <산중전기>와 <공산영우>를

반드시 상영하기로 하고, 그의 객잔 4부작의 대표격인 <용문객잔>과 칸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던 <협녀>를 회고전의 프로그램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판권까지 소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판권소유자의 상영허가를 받는 일이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 회고전의 의의를 확신시킨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일이라서인지 상영허가를 거절하는 판권자들이 몇명 있었다. 결국 홍콩까지 찾아가 협조를 구했지만 <공산영우>는

허가를 얻지 못했고 그뒤 추진한 <영춘각의 풍파>도 포기해야 했다. 4월에 참가한 홍콩영화제에서의 성과는 회고전의 필자인 스티븐

테오와 피터 리스트를 만난 일이다. 처음 대상으로 떠올렸던 데이비드 보드웰과의 만남을 고대했으나, 매년 홍콩을 찾던 그가 올해는 사정이 생겨

불참한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스티븐 테오(그는 98년 홍콩영화제의 호금전 회고전 자료집의 상당부분을 채운 사람이다)는 흔쾌히 원고를 써주기로

했고 피터 리스트도 원고 작성을 자청하였다.

영화제가 끝날 무렵,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던 쉬펑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쉬펑은 <용문객잔> 이후 <협녀>와 <충렬도>

등 호금전의 주요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산중전기> <공산영우>를 찍을 때는 한국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기도 했던,

첸카이거의 <패왕별희>의 프로듀서로서도 잘 알려진 배우이자 제작자이다. 홍콩섬의 상해대반점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녀는 친절하게 자신이 한국에서 영화를 찍었던 때의 일화를 얘기하기도 하고, 동석했던 피에르 르시앙에게 앞으로 함께 작업할 중국권 감독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피에르는 쉬펑에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호금전 회고전의 중요성을 확신시켜주었고, 20여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기로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회고전은 이처럼 풍성하게 준비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호금전과 그의 영화를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십여년간 모아온 자료와 테이프를 기증해준 호금전의 영원한 팬, 오빠 김영교씨에게 감사를 전한다. 아무쪼록 호금전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회고전이 큰 선물이 되고, 그를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는 발견의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이 온다

▶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 미리보는

부천영화제 초청작 다섯 편

▶ 호금전

마지막 인터뷰

▶ 호금전을

추억하다

▶ 회고전을

열기까지 준비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