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삼 | 감독 나는 젊은 시절, 그가 감독한 <대지아녀>에서 엑스트라로
일본 병사 노릇을 하면서 그의 모습을 처음 봤다. 그리곤 곧바로 그를 찬미하고 존경하게 됐다. 그는 큰 스튜디오를 완벽하게 장악하면서도 철저히
이타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데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그를 중국 민담 속의 검객 같다고들 하는데, 나도
동의한다. 그는 영화의 시인이요 영화의 화가이며 영화 철학자다.
운린웬 | 영화업자 호금전은 영화를 만들 때마다 두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는 늘 예산을 초과하는 것, 다른 하나는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용문객잔>의 성공 이후 그의 프로듀서는 영화를 연휴시즌에 맞춰
개봉하려 했지만 호금전은 늘 일정을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한번 일한 프로듀서는 다시 그와 작업하려 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였던 레이먼드 초우조차도
<영춘각의 풍파>와 <충렬도>를 하고는 다시 그와 손잡지 않았다. <협녀>는 너무 오래 걸려서 영화사 사장이
매일같이 와서 “그거 언제 끝낼 거야? 언제 끝낼 거냐고?”라며 독촉했다. 영화도 너무 길어져 결국 두 파트로 나눠 대만에서 개봉했는데 흥행
참패했다. 홍콩에선 잘라서 다시 한편으로 묶어 개봉했는데 호금전 손에 편집을 맡기지 않았다. 그가 하염없이 붙들고 있을 거란 짐작 때문이었다.
분노한 호금전은 친구들과 힘을 합쳐 <협녀>의 해외판권을 샀다.
허안화 | 감독 1975년에 호금전 프로덕션의 사환 노릇을 하면서 영화일을
시작했다. 호금전은 무척 부지런했고 지식에 굶주린 사람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그는 매일 15종 이상의 신문을 봤다. 아버지의 권고로 방송사에
들어가기까지 3개월간 일했지만 호금전은 나를 정말 친구처럼 대했다. 1989년 호금전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소오강호>를 한달
만에 끝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촬영장에 갔더니 모든 게 엉망이었다. 서극과 의견다툼을 벌이다 호금전은 이미 떠난 뒤였다.
다음날 서극은 나를 공동 감독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내가 찍은 것도 호금전이 찍은 것도 전혀 <소오강호>엔 들어 있지 않다. 서극이
모든 장면을 다시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오강호>는 주제와 스타일과 디자인에서 호금전의 것이다.
쳉페이페이 | 배우 그를 처음 안 건 1960년대 초 쇼브라더스가 세운 연기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호금전도 강의를 맡고 있었는데, 나와 동료 연수생들은 그의 집에 놀러가는 게 즐거운 일과였다. 그는 말하는 걸 좋아했는데,
어떤 주제든 막힘이 없었다. 1964년 <대취협>을 만들 때 여주인공 역은 원래 무술학교 출신이 맡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호금전은
내가 훈련한 발레가 그 역에 더 맞을 거라며 나를 추천했고 결국 오디션 끝에 내가 맡게 됐다. 호금전은 매우 섬세한 연출자였다.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지시했다. <대취협>을 볼 때마다 그의 그늘 아래 내가 있음을 느낀다. 그는 내게 맞는 쌍칼을 디자인해 만들어줬으며 나뭇잎
보는 법, 촛불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의 학생이었고 사도였다. 그가 말년을 우울하게 보냈다고들 하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LA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그는 공부하고 있었고 배우를 찾고 있었고 만들 영화를 고민하고 있었다(<대취협>의 여주인공을 맡았던
쳉페이페이는 35년이 지난 뒤 리안의 <와호장룡>에서 사악한 여우 역으로 등장해 호금전 팬들에게 깊은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우밍카이 | 배우, 무술감독 나는 11살 때 <대취협>의 거지 아이로
나왔고 평생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홍금보와 내가 <영춘각의 풍파>와 <충렬도>의 무술감독으로 일한 뒤부터 나는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그로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걸 배웠고 그가 없었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호금전은 참으로 지혜와 명예의 인간이었다. 그와
함께 일하면 스타든 무술감독이든 관계없이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한다. 대신 그로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걸 배우게 된다. 그건 중국의 전통적인
스승과 도제관계와 같다. 그의 인생은 전부 영화에 바쳐졌다. 그는 말년에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수십번 반복해서 보면서 숏 하나하나를 연구했다.
40년 동안 영화계에 있었지만 호금전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손가민 | <공산영우> <산중전기>프로듀서 한국에서 <공산영우>와
<산중전기>는 특이하게 찍었다. 한 영화의 한 장면을 찍고 나서, 배우들의 옷을 갈아입혀 다른 영화의 장면을 찍는 식이었다. 이건
홍콩에선 대단히 드문 촬영 방식이었지만 호금전한테는 맞았다. 호금전은 6개월에 영화 한편 만들기 힘든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방식으로
1년에 두편은 만들 수 있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갖가지 일이 많이 생겼다. 절 한 군데(해인사)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 우린 그곳에서 6대 부처가
손으로 쓴 불경을 발견했다. 전세계에 3권밖에 없는 것이어서 호금전은 그걸 사진으로 찍고 싶어했다. 그러나 국보라는 이유로 주지가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냥 보는 것조차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전을 짰다. 촬영팀이 관광객으로 가장해서 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당 승려를 매수해서 우리가 들어간 뒤로는 다른 곳에 가 있도록
했다. 배우들은 보초를 세웠다. 이때 찍은 장면들은 <공산영우>에 삽입됐다. 진짜 서재였기 때문에 그 장면들은 인공조명으로는 나오지
않았을 근사한 분위기를 띠게 됐다. 한국인 프로듀서에겐 비밀에 부쳤는데, 그는 이튿날 알아채고 정부에 그 사실을 알렸다. 모두 초긴장 상태가
됐다. 그날 밤 호금전과 조감독 그리고 몇몇 배우들은 숙소를 재빨리 옮겼다. 그런 뒤 호금전과 통역자 한명은 밤길 100km 이상을 달려 서울에
있는 미 정보국에 문제의 필름을 맡겼다. 남아 있던 나와 한국인 프로듀서 의상 디자이너 등은 한국 경찰에 체포돼 3일간 감방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런 곤경 끝에 두 영화는 완성됐다.
* 이상은 1998년 홍콩영화제의 호금전 회고전 카탈로그에 실린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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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호금전이 온다
▶ 호금전
감독의 작품세계
▶ 미리보는
부천영화제 초청작 다섯 편
▶ 호금전
마지막 인터뷰
▶ 호금전을
추억하다
▶ 회고전을
열기까지 준비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