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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감독 가상인터뷰(3)
2002-10-18

비로도 마스크 사나이의 피가 끓는다

콤플렉스는 없으셨는지요. 특히 배우로서 선생의 용모가 적격은 아니었다는 평가는 꽤 많은데요.

= 동무 하나가 그러드만. 거울을 연인 삼았냐고. 밥먹을 때도 거울과 마주앉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맨 먼저 방 안을 두리번거린 뒤 거울을 정면하여 앉는 버릇이 있었다네. 내가 내 얼굴 모르겠나.(웃음) 괴벽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겠지. 각선은 꾸부정하고, 키는 5척이 안 될 만큼 작고, 목소리 또한 깔깔했고, 거기다 호흡은 씩씩거리기 일쑤였고. 심술궂고 변덕스럽고 표독스런 인물의 형상이니. 스마트한 선남형이나 노블한 신사형하곤 거리가 멀었지. <해의 비곡>이 제작될 당시 배우를 지망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경손 감독이 앞으로 악역할 사람이 없으면 정말 곤란할 것이라고 일본인 제작자를 설득해서 겨우 통과시켰다고 하더만. 내 영화에선 평범한 사람보단 미치광이가 주인공으로 나오잖아. 그거, 내가 주연하려고 그런 거야.(웃음)

<벙어리 삼룡>에선 커다란 화염이 등장해야 하는데 어떻게 찍으셨는지요.

= 삼룡이 화염에 싸인 안방에서 여인을 구하는 장면 말이지. 동대문 밖에서 찍는데, 대문, 마루, 안방 세트에 골고루 불을 붙여야 했다고. 종이와 헝겊으로만 집모양을 만들면 너무 빨리 탈 것 같아 널판장을 대고 석유 한통 사다 골고루 뿌렸지. 그래도 양이 안 차. 내 몸에 실제로 불이 달리는 것을 박으려고 내 솜옷 위에다가도 석유를 쳤어. 농약 치고, 비료 주듯이. 이제 박기만 하면 된다 싶어 불을 붙였더니 화약처럼 펑하고 터지는 거야. 근데 카메라는 돌지, 어떡해. 그냥 가는 거지. 찍고 나선 일단 땅 위에 구르라는 말 듣고 목숨은 건졌지. 그 일로 한달 동안 앓아누웠고, 그때 여인 역을 맡았던 류신방(위의 오춘선)도 머리 타고, 젖가슴까지 탔어.

영화를 만든다는 게 매번 속태우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애탔던 기억을 꼽는다면.

= <아리랑3>를 찍을 때였는데. 이태원에 촬영소를 만들고 동경에서 녹음기며 라이트를 사들이고 배우들도 전속계약하고 나름대로 의욕을 부렸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제 다시 한번 해보자. 뭐 그런 거였지. 근데 말이야 3개월 동안 애써 만들어놨는데 나중에 말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발성영화란 놈이 말을 못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침 경성촬영소에서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내놨다고 그러는 거야. 복장터질 일이었지.

선생에 대한 검열의 눈초리도 갈수록 매서워집니다. 검열당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흥행에 도움이 됐을 정도니까요.

= 검열당하지 않은 작품은 2∼3편에 불과해. <사랑을 찾아서>는 특히 심했어. <두만강을 건너서>라는 원제가 간섭당해 <저 강을 건너서>로 바뀌고 결국 개봉 때는 <사랑을 찾아서>로 바뀌었잖아. 간도까지 로케 가서 6천원씩이나 들여 박은 14권 분량 중 6권 분량이 통째로 날아갔어. 관객이 이해를 못할 수준이었을 거야.

일본 국수회의 지회장이 자금을 댔던 <금강람> 등에 출연하거나 배구자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무대 생활을 한 것에 대해 손가락질도 심했을 텐데요.

= 제 영화가 이제 환영을 못 받으니까 일본놈 뒤 닦아주고, 극단을 쫓아 시골을 돌아다니며 밥벌이하는구나, 라고 험담들 했지. 타락했다는 건데. 안 그랬으면 어땠을까. 나 굶어죽었거나 도적질했을 거라고. 전주 구하느라 뛰고 그래서 1년에 몇 작품 해서 받는 연출료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들었어. 전당포 들락거리고, 여관밥 외상달고, 그러다 연극 들어와서 다시 몇달 먹을 밑천이라도 마련해야지 서울에 올라와 다음 영화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이 됐으니까.

연출작 중 가장 흡족한 작품은 무엇인지요.

= 하나도 없어. 처음 만들 때야 자신만만했지. 그런 마음이 정작 작품을 만들어놓고 다음에 보면 단 하나 내 마음에 맞도록 된 게 없었으니. 내 10년 영화하고 나서 그랬다고. 모아놓고 확 불질러버리고 싶은 작품 몇편만이 내 수중에 있을 뿐이라고.

생전에 못해본 것이 있다면.

= <황무지> 프로젝트도 그렇고, 하고 싶던 작품들이 몇 있지. 개인적으론 여비가 넉넉했으면 아메리카로 건너가 영화촌에 틀여박혀 반년 정도 마음대로 영화구경이나 하고 싶었지. 아, 그리고 지난번 책에서 채플린 특집은 잘 봤네. 내 생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거든. 아, 그런데 단성사는 여전히 번창한가 가는 길에 한번 둘러보고 가야겠군.

아. 지금은 멀티플렉스로 단장하느라 공사 중입니다.

= 뭐라고

10개관 이상의 스크린이 옛터에 동시에 들어서는 셈이지요.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어쨌든 오늘 너무 많이 떠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건투를 비네. 그럼. 이영진 anti@hani.co.kr

* 이 인터뷰는 아래 자료와 참고문헌에서 인용, 발췌, 재구성한 것입니다.

<아리랑이 보고 싶다>(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 편, 미래문학사),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최창호, 홍강성, 한국문화사), <한국영화측면비사>(안종화, 현대미학사), <한국영화전사>(이영일, 삼애사), <일제 침략하에서의 서울>(서울특별시편찬위원회), <춘사 나운규 전집-그 생애와 예술>(김갑의 편저, 집문당), <나는 살아서도 영화인이며 죽어도 영화인>(최금동, 한국필름보관소),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대성의 형성>(김진송, 현실문화연구),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전재정 외, 혜안), <씨네21> 회고록. 그 밖에 오랫동안 <아리랑> 연구와 취재를 진행한 서경웅 감독이 스크랩한 자료의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