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는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을 합친 개념의 기관입니다.” 올해 초 36살의 젊은 나이로 CNC의 대표로 취임한 가에탕 브뤼엘이 한국을 찾아 CNC의 역할을 명확히 정리했다. CNC는 TV, OTT 시리즈 등 영상산업 전반의 제작과 배급을 지원하는 프랑스 문화부 소속 정부기관이다. 가에탕 브뤼엘 대표가 선장으로 승선한 CNC는 로케이션 사업을 포함해 프랑스 내 영화제작의 빈도를 늘리고자 한다. 이미 대표로 취임하기 전부터 주미 프랑스대사관 산하 문화서비스 부서에서 프랑스 창작자들을 위한 미국 레지던시 프로그램 ‘빌라 알베르틴’(Villa Albertine)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만큼, 그가 전세계의 창작진과 영화를 프랑스 내에서 어떻게 지원하고 보호할지에 관심이 모인다. 가에탕 브뤼엘 대표는 방한 일정 중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 BIFAN+의 개막식 연사이자 AI 국제 콘퍼런스의 패널로 참여했다. 영화제로 향하기 전, 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가에탕 브뤼엘 대표와 <씨네21>이 나눈 대화를 전한다.
- 취임 후 첫 방한의 계기로 부천영화제를 선택했다. 부천영화제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인상은.
CNC는 한국의 장르영화에 관심이 크다. 그래서 자연히 부천영화제와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프랑스영화 중 ‘판타스틱’ 장르에 속하는 신진 아티스트를 한국에 소개할 수 있어 기쁘다. 또한 올해 BIFAN+의 NAFF에 프랑스의 프로듀서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CNC가 상을 수여하기로 한 터라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CNC는 장르영화의 미래를 믿는다. 이를 위해 세계 각국의 영화제와 협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올해 영화제의 중요한 화두는 AI의 영화제작 내 활용이다. 올해 영화제 기간 중 AI 콘퍼런스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프랑스 내부에서 혹은 CNC 내부에서는 콘텐츠 산업 내 AI 활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AI가 촉발한 담론은 영화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 중 하나일 뿐이다. 이 논쟁이 극장의 미래를 향한 염려의 시작도 끝도 되지 못한다. AI가 인간을 대체 가능한지를 논하기보다 AI가 작품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아직 AI로 만든 영화는 완성도가 미흡하지 않나. AI가 인간의 창의성을 조력하는 도구가 아닌, 제작비 감축의 용도로 사용된다면 경계하는 편이 옳다. CNC에서 영화제작 지원 심사를 할 때 AI 사용 여부가 감점 요인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규정상 제작 과정 중 AI가 사용된 분야를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AI가 지닌 위험성을 경각하기만 한다면 AI의 사용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 이재명 대통령이 근래 문화예술계 수상자 간담회를 열며 ‘문화예술인 기본소득 지급’ 도입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이를 제도화한 것으로 아는데.
프랑스에는 앵테르미탕(Intermittent du Spectacle)과 같은 공연예술인을 위한 실업보상제도가 마련돼 있다. 앵테르미탕은 매년 실수령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 수요에 맞게 개정된다. 프랑스는 지금까지 제작자, 배급사, 극장에 맞춰 영화 정책을 집행해왔다. 요즘은 영화를 구상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예술가들이 안정된 소득 안에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도록 제도적 트랙을 마련하려 법률을 일부 개정했다. 창작부터 배급까지 모든 단계에 신경을 쏟는 것이다. 창작자가 없다면 시나리오는 누가 쓰고, 배급사가 없다면 누가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겠나. 영화계에 위기가 찾아올수록 더 다양한 이야기가 쓰이고 극장에 걸려야 한다.
- 올해 칸영화제 기간 중 <버라이어티>와 인터뷰에서 프랑스 로케이션 사업의 일환인 스튜디오 백롯(Backlot)을 소개했다. 마크롱 내각의 주요 거점 사업 중 하나였다고.
외곽이라고 하지만 파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웃음) 총 12개의 스튜디오로 오스만 거리나 몽마르트르 등 파리의 주요 랜드마크는 물론 19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파리 풍경을 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모듈 변경이 자유로운 것 또한 백롯의 장점이다. 호텔을 대사관저로, 지하철 출입구를 제2차 세계대전의 벙커로 바꿀 수 있다. 이미 인프라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제작비 경감의 측면에서도 이점이 크다. 가령 프랑스에서 촬영한 <서브스턴스>는 1800만유로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런데 이를 미국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었다면 8천만유로 정도가 들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하면 비용이 많이 들 것으로 생각하지만 영화산업에 대한 지원이 막강한 나라라 비용 집행을 줄일 수 있다.
- CNC가 해외 작품의 공동제작에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각 작품의 지식재산권(IP) 보호에도 열중하는 듯하다.
프랑스는 문화 주권을 중시한다. IP야말로 문화의 부가가치를 지켜내는 교두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작품이 탄생해 플랫폼에서 소비될 때마다 IP의 소유권 문제가 화두다. 프랑스는 자국의 IP 확보를 위해 글로벌 플랫폼의 IP 독점을 규제한다. 이 점에 있어 한국은 IP 보호보다 IP 개발에 강점을 보인다는 차이가 흥미롭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와 프랑스 영화학교인 라 페미스(La Fémis)가 교류한 지 3년차가 되며 공동제작이 가능해졌으니 서로의 성공 사례를 공유하면 좋겠다.
- 글로벌 플랫폼에 대한 프랑스의 IP 규제책을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해외 OTT 플랫폼이 제공하는 수익의 일부를 기금화한다. 이 금액이 연간 8억유로 정도다. 이중 40%는 자국 내 영화제작에, 40%는 방송 제작에, 나머지 20%는 비디오게임을 포함한 콘텐츠 제작에 사용한다. 각 분과에서도 균형 잡힌 재분배를 하고자 노력한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가리지 않고 투자하고,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65개의 기금 중 해외 공동제작 영화를 위한 절차도 마련해놓았다. 기금 사용 절차는 현장의 수요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뀐다. 프랑스영화계에는 “CNC가 영화판의 주인이자 하인이다”라는 농담이 돌곤 하는데, CNC가 주인의식을 가지되 마치 하인이 봉사를 하듯 영화계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CNC는 영화와 함께 발맞춰 나가는 단체이며 산업 한복판의 목소리를 듣는 창구다. 앙드레 말로도 “영화는 예술일 뿐만 아니라 산업이다”라고 하지 않았나. 문화는 궁극적으로 공공에 이바지한다. 영화를 다룰 때는 시장의 논리와 예술의 논리 모두를 염두에 둔 채 상생할 방안을 고심해야 맞다. 영화가 상품처럼 소비되지 않도록, 영화관이 스크린 이상의 문화 주권을 수호하는 영토가 되도록 지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씨네21> 독자들을 위해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데….
- 한마디해달라. (웃음)
날이 갈수록 다양성의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한다. 영화관도 서점만큼 다양한 선택지에서 작품을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관객들이 극장에 발길을 보내지 않는 이유엔 상업영화 위주의 배급 환경, 개봉주 예매율에 따른 상영 일정 차등도 영향이 있으리라고 본다. 만약 사람들이 프랑스영화를 좋아한다면 그 기저엔 오랜 역사가 한몫할 것이다. 영화가 유산이라면 보존해야 한다. 다음 방한엔 문화 어젠다 차원에서 양국의 영화 아카이빙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