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최초의 프린세스인 ‘백설공주’가 장편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통해 탄생했다. 그로부터 90여년이 지난 올해, 새로운 해석을 더한 실사 <백설공주>가 당도했다. 그레타 거윅과 <걸 온 더 트레인>에 참여한 에린 크레시다 윌슨이 각본을 쓰고 <500일의 썸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마크 웹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원작과 상당 부분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제작 단계부터 화제가 됐다. 가령 원작과 달리 <백설공주>의 피부는 희지 않으며, 그의 주체성이 강조돼 왕자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마법의 거울이 답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외면이 아닌 내면의 것이 포함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원작의 고유성을 유지하길 바라는 팬들의 반대에도 <백설공주>는 PC주의(정치적 올바름)를 포기하지 않고 반영했다. 그 결과물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이지현 평론가가 살펴본 <백설공주>의 긴 리뷰를 전한다.
하늘에서 하얀 눈보라가 몰아치던 날, 왕국에 공주가 태어난다. 아이의 이름은 날씨를 본떠 ‘백설’로 정해진다. 백설공주(레이철 지글러)는 온정이 넘치는 나라에서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하지만 병든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왕이 새로 맞은 아내(갈 가도트)가 어둠의 힘으로 군중의 욕망을 통제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두려움에 숨죽인 사람들 사이에 이기심이 팽배해진다. 나라 안은 도적이 활개를 치고 사람들은 더이상 사랑하지 않고 무언가를 나눠갖지도 않는다. 그렇게 왕이 남쪽의 전쟁터로 떠나자, 왕비는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지?” 매일 그녀는 마법의 거울에게 묻는다. 그 대답은 당연히 그녀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어느 날, 거짓말을 못하는 거울이 “백설공주가 내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답하면서 여왕은 분노한다. 급기야 사냥터 관리인에게 공주를 숲으로 데려가 죽이라고 명하고, 공주의 심장이 담긴 상자를 성에서 기다린다. 하지만 사냥꾼은 공주를 놓아준다. 대신 상자 안에 무거운 사과를 담아서 돌아간다. 그렇게 혼자 마법의 숲을 헤맨 백설공주는 동물들의 도움을 받아 일곱명의 작은 광부들이 사는 집에 도착한다. 다이아몬드를 캐는 광산에서 일하는 이 마법의 종족은 각각 ‘박사, 부끄럼, 심술이, 재채기, 행복, 졸음, 덤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25년 개봉된 실사영화 <백설공주>의 원작은 1937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만든 장편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이다. 원작에서 난쟁이의 숲속 오두막에 도착한 공주는 딱 한번 만났던 남자를 떠올리며 “언젠가 내 왕자님이 오실 거야”라고 잠들기 전에 되뇐다. 원작의 이러한 소망은 순수한 동화에 더 가깝다. 하지만 리메이크된 최신 영화는 그런 식의 대사를 포함하지 않는다. 대신 공주는 언젠가 왕궁에서 마주친 미래의 파트너를 떠올리며, 여왕의 곁에서 조심스럽게 조언한다. “나누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세심하게 떨린다. 사실 숲속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원작과 실사영화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마크 웹이 연출한 이번 영화는 많은 점에서 원작에 꽤 충실한 편이다. 다만 몇몇 부분에서 이야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영화는 과감하게 현대적인 각색을 가한다.
먼저 익숙한 것들부터 살펴야 한다. 숲속의 집에 도착한 공주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집 안 청소’에 나선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이 장면은 공주가 집주인들에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그녀의 요리 솜씨 역시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에서 그녀는 열정적인 조언자로 활약한다. 일을 분담해서 나눠주고, 의견 차이를 조율하는 리더십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도 ‘독이 든 사과’가 등장한다. 죽음의 붉은 사과는 여왕의 변신과 함께 묘사되며,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마법이 주는 동화적인 감수성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의 결말 역시 ‘왕자의 키스’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고, 조나단(앤드루 버냅)이라고 불리는 도적단의 리더가 공주의 새로운 파트너가 된다. 조나단은 여왕에게 대항해 백성들을 돕는 인물로, 숲에서 도적단과 함께 살고 있다. 숲으로 도망친 공주와 그가 마주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영화는 이들 사이의 믿음에 대한 연결고리를 채운다. 따스한 백설공주와 의적 조나단의 만남, 이 둘의 관계는 마크 웹의 이전 작들에서 보았던 로맨틱코미디의 룰이 적용되어 표현된다. 영화는 사랑하는 사이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의 묘사보다는 그 관계에 관한 상호간의 비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다. 이번 영화를 제작하기 전, 논란이 되었던 몇 가지 부분을 돌이켜본다. 먼저 일곱 난쟁이가 CG로 묘사된 부분은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다. 작품 제작이 발표되었을 당시에 피터 딘클리지와 같은 할리우드 배우들은 고정관념적인 난쟁이 묘사에 관해 공개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를 예상이나 한 듯 디즈니는 왜소증 배우들을 해당 역할에 고용하지 않을 것이며, 해당 프로덕션을 디지털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아쉽다는 반응이 더 많이 들렸다. 완성된 영화의 최종 그래픽도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둥글고 유머러스한 과거의 일곱 캐릭터들은 더 이상 없다. 직설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순수한 반응도 이곳에는 없다. 어쩌면 이번 디즈니의 결정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또한 마법의 활용도에 있어서도 디지털화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주요 주연들의 표현에 아쉬움이 있다.
무엇보다 백설공주 캐스팅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대놓고 흰 피부의 아름다움만을 강조하는 원작의 설정을 버리고 각색을 선택했다면, <백설공주>가 실사로 지금 만들어져야만 했던 이유를 기술적, 서사적으로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대신 정치적 올바름만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반감을 살 수밖에 없다. 한때 레이철 지글러가 발언한 “여성의 역할 측면에서 매우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원작에 대한 평가는 기존 팬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었다. 요컨대 끊임없이 옛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에서 주저하면서 <백설공주>는 새로운 청중의 취향을 통해 과도하게 스스로를 올바르게 포장하고 있는 듯이 비쳐진다.
원작에 대한 오마주와 미적 진보성 사이의 혼란, 이 틈새에서 이번 영화는 후자에 좀더 무게를 둔다. 기존 모델을 잊게 만들거나, 적어도 그들과 공존할 것, 리메이크의 두 가지 방식에서 완성된 영화는 강하게 후자의 방식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마도 그 이유는 디즈니의 상황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들은 ‘디즈니+’라는 OTT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작 <인어공주>(2023)와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역시 리메이크를 통해 스스로의 카탈로그를 보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예전 월트 디즈니가 살아 있을 당시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면 참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주죠.” 실제로 1933년에 디즈니가 내놓은 단편영화 <아기 돼지 삼형제>가 공개되었을 때, 당대 비평가들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늑대를 일컬어 ‘나치의 위협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비록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해도 역사적으로 디즈니사가 수행한 역할은 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회의 주류와 결합하며 촉진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그러니 새로운 영화는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대중은 더이상 선과 악의 대립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의 힘에 대한 환상이 주입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직 표현의 세련됨에 대한 평가일 뿐, 이번 영화의 배경이 된 ‘인종차별’ 혹은 ‘외적 분류’라는 무거운 유령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PC주의에 대한 반감을 영화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일부 납득할 여지가 있다. 이제 <백설공주>는 고전이 아니라, 디즈니의 레퍼토리 중 하나로 인정받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무수한 역할들 중 유일하게 갈 가도트가 연기하는 여왕만이, 몇년간 디즈니가 그토록 멀리하려던 ‘순수 악’에 근접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의 주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상기시킨다. 여왕 캐릭터의 전형적인 모습, 그녀는 계속해서 분노를 일으킨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특정 주제에 접근하는 전형적인 극우의 행태를 보인다. 보수적으로 강하게 기존 플롯을 유지하는 방식, 이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그녀가 지닌 익숙한 표현에 안도하게 된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그녀의 손에 들린 다이아몬드는 현대의 워키즘(깨어 있음)이 그토록 혐오하는 고딕적인 분위기를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존 동화에 대한 환상, 새로운 대상 청중을 향한 메시지, 이 간극 사이에서 우리는 캐릭터들을 새롭게 경험한다. 다행인 점은 이번 영화 역시 뮤지컬영화로서 완성도가 높다는 사실이다. <라라랜드>(2016)를 통해 브로드웨이에서 영화로 활동 영역을 옮긴 저스틴 폴과 벤지 파섹 듀오는 이번에도 새로운 뮤지컬 넘버들을 완성도 있게 선보인다. 테마곡 <Waiting On A Wish>와 는 기대치만큼 훌륭하다. 고전 넘버의 재해석인 <Heigh Ho> 역시 유쾌하게 울려 퍼진다. 만일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한다면 분명 레이철 지글러가 선보이는 초반부 시퀀스에서 안도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번 <백설공주>는 가족들이 함께 관람하기에 무리가 없는 리메이크이다. 그 반발의 정도는 아마도 공주가 입고 있는 노랗고 전형적인 드레스만큼만 반항적일 것이다. 익숙하거나 혹은 유치하거나, 그 정도가 전부다. 1960년대에 디즈니가 설파하던 평화주의와 여성주의의 양상은 여전히 영화를 관통하고 있다. 그 반문화적인 움직임, 문화소비에 있어 영원한 것은 단지 ‘현재’뿐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기억하게 만든다.
원작과 영화, 이렇게 달라졌다
원작에서 공주가 사는 성은 스페인 세고비아의 ‘알카사르’를 모티브 삼는다. 이번 영화의 프로모션은 이례적으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는데, 바로 세고비아의 알카사르에서 개봉 기념 스크리닝 행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성 모양이 이전과 다르다. 프로덕션디자이너 케이브 퀸은 그림 형제의 이야기가 탄생한 바이에른 지역의 느낌을 강조하고 싶었고, 그래서 독일 마이센의 ‘알브레히츠부르크’가 지닌 쏟아오르는 고딕적인 느낌을 살렸다. 성의 윤곽은 스위스 베이토의 ‘시옹’을 참고해 완성됐다.
원작에서 공주가 누워 있는 장소는 유리와 금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관이다. 하늘에서 독수리들이 내려다보기 때문에 난쟁이들은 공주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그곳을 둘러싼다. 한편 실사영화에서 사과를 문 백설공주가 잠이 든 장소는 숲속의 바위 위이다. 언뜻 연극 세트처럼 황량한 곳에서 그녀는 죽지 않은 채 반듯하게 누워서 마법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원작이나 이번 영화 둘 다 일곱명의 가상 캐릭터들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는데, 2025년작 영화는 그들이 캔 광물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 오직 여왕만이 다이아몬드를 ‘칼’로 이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