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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춤추는 몸 뒤의 포옹, <아노라> 환상을 파는 대신 인간의 물성을 보여주다

<아노라>의 첫 장면은 인상 깊다. 이곳은 스트립 클럽. 춤추는 댄서를 차례로 지나치던 카메라는 문득 한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거기에는 애니(마이키 매디슨)가 있다. 카메라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여태 댄서의 외설적인 몸을 담아내던 카메라는 춤추는 애니의 몸을 지나쳐, 어느덧 그녀의 얼굴 앞에 친근하게 다가선다. 이 클로즈업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선사한다. 먼저 그녀의 표정을 우리에게 자세히 보여주고, 다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외설적인 이미지를 스크린 바깥으로 추방한다. 통상 우리에게 익숙한 클로즈업의 기능은 무언가를 크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스크린을 가득 채운 애니의 얼굴만큼이나 인상 깊은 것은,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는 성적인 이미지다. 다른 것을 내보내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 이 순간의 묘한 클로즈업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장면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이 장면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많은 이들이 숀 베이커의 주된 관심사는 성 노동 산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미국이 파는 이미지’에 가깝다. 현실의 흉터를 말끔히 지운 채 우리를 향해 방긋 웃는 환상적인 이미지. 그것은 포르노인 경우도 있고(<스타렛> <레드 로켓>), 디즈니랜드인 경우도 있다(<플로리다 프로젝트>). 숀 베이커는 그런 이미지의 표면에서 출발해, 그 이면에 들러붙은 더럽고 질척질척한 현실에 도착한다. 서로 조화하지 못한 채 덜컹거리는 현실과 환상. 이는 숀 베이커 영화를 추동하는 두개의 축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아노라>에서도 그의 관심은 여전하다. 성 노동이 재화로 빠르게 치환되는 곳에서 애니는 제법 실력이 좋다. 그녀의 평온한 일상을 흔든 것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마르크 예이델시테인). 그가 애니에게 청혼한 순간, 둘의 심플한 관계는 복잡해진다. 이반은 고객인가, 남편인가? 성 산업의 환상을 지키던 장막은 찢어지고, 그 틈새로 현실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온다. <아노라>의 큰 줄기는 달아난 이반을 찾는 일이지만, 사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다. 스트립 댄스, 섹스, 3캐럿 다이아몬드. 성 산업이 가져다준 달콤한 꿈에 머물던 애니가 마침내 현실을 마주했을 때,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을 향한 조롱도 있고, 강압적인 대우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그녀의 말이 무참히 무시당하는 순간이다.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 일행은 악다구니 쓰는 애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한다. 애니가 이반의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인사했을 때, 이들은 마치 들어선 안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경악한다. 애니의 말은 전적으로 부정당하기 일쑤다(“넌 우리 가족이 아니야”). 이것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는, 숀 베이커의 영화에서 ‘수다’는 줄곧 영화를 지탱하는 활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탠저린>에서도,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열심히 입을 놀리며 떠들어댄다. 말이 안되거나 상스러워도 상관없다. 자기 의지대로, 하고 싶은 만큼 실컷 떠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소음과 소란이 위태로운 삶을 존속시키고, 그들이 한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아노라>의 애니는 무시와 강압 앞에서 자주 입을 다문다. 이때 애니가 빼앗긴 것은 단순히 말할 기회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최소한의 존중이다.

그런 애니에게 발언권을 되찾아주는 이는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다. 그는 애니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변할 때 웃음 짓고, 이혼 절차가 끝난 뒤 이반 가족을 향해 “애니에게 사과해라”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사과하지 않았지만, 이 응원 같은 한마디로 애니의 거침없는 상욕이 되돌아온다. 애니가 떠드는 모습을 좋아하는 이 남자는, 그녀를 한명의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애니가 이반을 욕할 때 쓴 “찌질이”라는 표현을 이고르에게도 쓴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용하는 맥락도 이상하다. 그녀는 이반이 자신을 배반하고 떠날 때, 그리고 이고르가 자신을 강간하지 않을 때, 똑같이 “찌질이”라고 내뱉는다. 이런 모습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같은 단어를 쓸 정도로 애니의 언어가 일천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녀가 폭력과 애정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반의 행동은 사랑같이 보이지만 폭력에 가깝고, 이고르의 행동은 폭력적이지만 애정에 가깝다. 하지만 애니가 변태, 강간범이라 일컫는 쪽은 이고르다. 애니는 아름답지만, 스스로를 지키기 버거워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고르는 애니를 집에 데려다준다. 차에서 내리기 전,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지만 애니는 그와 관계를 시작한다. 이 모습은 애니가 추었던 스트립 댄스를 연상시키고, 카메라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이고르는 문득 애니의 얼굴을 당겨 키스하려 한다. 이 순간 일종의 서비스로 보였던 그들의 행위는 애정 표현의 영역으로 슬며시 넘어간다. 그 투박한 행동 앞에서, 애니는 다시 한번 화를 낸다. 하지만 곧이어 터져나오는 울음. 이 순간은 애니가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보인 유일한 순간이다. 남자를 닮은 낡은 차, 그 안에서 여자를 꼭 끌어안은 남자. 애니는 무수히 상처입었지만 이곳에서 안전하다. 이때 이고르가 힘껏 끌어안은 것은 애니에게 한 조각 남겨진 인간성이다. 이때 카메라는 다시 한번 슬며시 그들의 얼굴을 향해 다가간다.

이제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이 스트립 클럽에서 애니는 하나의 외설적인 몸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주목하는 것은 다르다. 카메라는 그녀의 춤추는 몸을 조용히 시야에서 지우고, 어둠 속에 숨겨진 얼굴과 그 위로 떠오른 표정에 집중한다. 이 클로즈업에서 카메라는, 사각의 프레임은 마치 애니의 얼굴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목받지 않는 그녀의 일부를 지키기 위해. 그 어떤 것도 이 안으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이 장면은 이고르의 포옹과 닮았다. 첫 장면에서 애니를 감싸안은 클로즈업은 마지막에 이르러 이고르의 단단한 팔로 바뀌어 그녀를 다시 한번 끌어안는다. 그 안에서, 애니는 비로소 운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영화가 인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비애 섞인 좌절도 싫고, 순진한 낙관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아노라>가 애니에게 선사한 순간은 진정 영화적인 위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종 웃거나 화내야 했던, 그 행동마저 자꾸만 가로막혔던 애니가 마지막에 낸 울음소리는 그녀가 냈던 소리 중에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이다. 그 울음으로 인해 애니는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노라>가 이 순간에 끝마치는 것은 적절하고 필연적인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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