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9일, 제37회 도쿄국제영화제(TIFF, 이하 도쿄영화제)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한 순간은 개막식에서 사회자가 등장할 때였다. 사회자는 마이크를 들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암전된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 내부 스크린에 거대하게 나타난 애니메이션 캐릭터, 버추얼 가수 카후였다. 두팔을 벌려 수백명이 넘는 참석자를 환대한 카후는 갈라 섹션 상영작부터 차분히 소개를 이어나갔다.
도쿄영화제는 사무라이 액션극 <11 Rebels>를 개막작으로 선보였다. 관객에게 다시금 이 성대한 영화축제가 일본에서 열리고 있다는 걸 각인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세계적으로 호평받은 160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미국 드라마 <쇼군>의 성공을 염두에 둔 선택처럼도 보였다(실제로 영화제에서 <11 Rebels>를 <쇼군>과 비교하는 외신기자들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11 Rebels>는 일본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보신 전쟁(1868~69년)을 무대로 한다. 사무라이들의 피 튀기는 장대한 액션이 확실한 볼거리라는 것이 중론이며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가 극의 재미를 견인한다. 일본의 전설적인 각본가 가사하라 가즈오의 수십년 전 각본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본 영화인들에겐 유의미한 작품이기도 하다. 출연배우들과 함께 <11 Rebels>를 소개하는 무대에 올라온 시라이시 가즈야 감독은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배우들과 진흙 속에 파묻혀서 찍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멀끔한 모습들이 정말 멋지고 자랑스럽다”며 시대극 촬영이 녹록지 않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응원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옆에 선 주연배우 야마다 다카유키도 마이크를 들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주 옛날 사람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는 이들처럼 더 잘하고 싶고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이러한 이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가닿기를 바란다”라는 그의 소감은 영화제가 전하고자 하는 통합과 공감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었다. 지난해 마스터클래스로 초대되었고 올해는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양조위는 영화제의 최고 스타였다. “우리의 심사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길 바란다”는 간단한 인사말에도 객석의 집중도가 남달랐다. 그의 영입 과정에 관해 묻자 안도 히로야스 도쿄영화제 이사장은 “그가 일본과 일본 음식을 매우 좋아하는 덕분에 가능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곧 “올해 3월 홍콩”에서부터 시작된 설득의 과정이 지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심, 여성, 고전… 영화제의 특색을 찾아서
1985년에 처음 개최된 도쿄영화제는 규모 면에서는 아시아의 주요 영화제로 성장했으나 특색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만큼 부산, 베이징, 상하이, 베트남 등 여타 아시아 영화제와의 차별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매해 하고 있다. 2021년 롯폰기에서 긴자 지구로 장소를 옮겨 도심 속의 영화제를 표방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올해도 쇼핑몰과 명품 숍, 고층 비즈니스 건물이 밀집한 도쿄의 히비야-유라쿠초ꠓ마루노우치-긴자 지역 일대에 행사장을 잡고 208편의 상영, Q&A 세션, 심포지엄, 마스터클래스, TIFF 라운지 토크 프로그램 등 방대한 이벤트를 열었다. 둘러본 바, 그만큼 영화제 방문객이 아닌 사람이 영화제 행사에 참여하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일례로 복합 쇼핑몰인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를 들른 방문객이 1층에 마련된 영화제 부스에 호기심을 갖고 상영 일정표를 확인하거나 건물 앞에 마련된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풍경이 영화제 내내 이어졌다. 안도 이사장은 도심 운영 4년차에 접어들면서 도쿄영화제가 시민 친화 영화제로 거듭나고 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길 가다가 영화 한편 보고 돌아가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다. 이 지역의 시민과 기업, 정부 기관의 환대가 매해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긴자 지구의 상점과 레스토랑이 매장에 포스터를 게시하는 등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도 도쿄 지요다구와 협력해 영화제를 공동 개최하거나 구민을 위해 무료 상영회를 여는 등의 방식으로 화답하고 있다.”
개막식 사회를 맡은 버추얼 유튜버 카후와 성우 사쿠라 아야네.
‘여성 영화인의 교류의 장’은 도쿄영화제가 앞으로 타이틀로 가져가고 싶어 하는 키워드다. 여성의 관점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내걸었으며 올해 여성 역량 강화 섹션(Women’s Empower ment Section)을 신설했다. 이 섹션은 여성 영화감독의 연출작, 여성 중심 이야기를 다룬 작품 9편으로 꾸려졌다. 안드리아나 츠베트코비치 수석 프로그래머는 이 섹션의 영화들을 “독일('Ivo'), 홍콩('현대 모성의 몽타주'), 테헤란('마이 페이버릿 케이크'), 미래 일본('Adabana')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여성의 삶의 현실을 탐구하고 그들의 숨겨진 정체성, 회복력, 변화를 보여준다. 전세계 여성의 다양성과 힘을 상징적인 작품들”이라고 강조했다. 섹션 신설 이유에 대한 질문에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1990년대에 ‘여성 자유 주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2001년쯤 예산 문제로 중단됐다. 이후에 전세계에서 훌륭한 여성감독이 등장할 때마다 이 프로그램을 재개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예산 문제가 해결되어 여성 역량 강화 섹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며 자세한 내막을 들려주었다. 2021년 도쿄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제 최초로 영화산업 성평등 증진 국제기구인 ‘Collectif 50/50’과 계약을 맺은 것도 신설에 영향을 미쳤다. 섹션의 하이라이트는 지난 11월4일에 열린 ‘여성 역량 강화에 관한 심포지엄: 여성감독들이 길을 개척하다’였다. 섹션에 초청된 감독들뿐만 아니라 니시카와 미와, 마쓰이 히사코 등 일본 중견 여성감독이 함께 자리했다. 이들은 경험과 생각을 나누며 여성감독을 육성하는 것이 전세계 영화계가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가이 사야카 감독은 “지금 일본 감독의 11%만이 여성이다. 이는 매우 적은 수치다. 우리는 여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하자 홀을 가득 메운 여성 참석자들의 뜨거운 지지가 쏟아졌다. 한편 올해 도쿄영화제에서 상영된 208편 중 여성감독이 만든 연출작은 37편으로 전체에서 21.9%를 차지했다. 이 비율을 점차 늘려나가는 것이 영화제의 미래 과제로 남았다.
일본 거장 영화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조명하는 행사는 도쿄영화제가 줄곧 내세우는 차별점이다. 일본 고전 섹션도 그래서 가지고 있다. “오즈 야스지오,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시마 나기사와 같은 훌륭한 감독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자국 영화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라고 말하는 안도 이사장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서 이 섹션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고전 섹션에서는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연출작 <나카노 스파이 스쿨> <레드 엔젤> <세이사쿠의 아내>를 초연했다. 일본 국민 배우로 불린 다카무라 겐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그의 출연작 <일본 야쿠자>와 <아바시리 교도소>도 상영했다. 이치야마 쇼조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꼭 봐야 할 고전으로 “탄생 70주년을 기념해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복원한 <고질라>”를 꼽기도 했다. 영화제는 별도 섹션뿐만 아니라 작고한 거장 감독의 회고전을 따로 연다. 올해 회고전의 얼굴로는 일본 아방가르드 영화를 이끈 요시다 요시시게를 선정했다. 그의 장편영화 10편, 다큐멘터리 3편을 6일에 걸쳐 세계 영화인에게 소개했다. 도쿄영화제가 고전영화를 강조하는 배경에는 극장영화의 가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 있다. 안도 이사장은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넷플릭스 영화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것에 대해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영화 동료들을 향한 메시지
경쟁부문 3관왕을 차지한
올해 도쿄영화제의 주인공은 <Teki Cometh>였다. 11월6일 열린 폐막식에서 최고상인 도쿄그랑프리/도쿄도지사상, 최우수감독상(요시다 다이하치), 남우주연상(나가쓰카 교조)까지 주요 3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다. 일본영화가 최고상을 받는 건 2005년 이후 처음이다. 완성도 높은 자국영화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최근 기조에 부합한 결과로 추측된다. 흑백영화인 <Teki Cometh>는 은퇴한 뒤 홀로 사는 노교수(나가쓰카 교조)가 죽음이라는 적과 싸우면서 보내는 여생을 담았다. 심사위원인 두기봉 감독은 “효과적인 영화적 언어를 통해 노인 캐릭터의 사고방식과 그가 직면한 문제를 복잡하게 묘사하여 매우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평하며 지지를 표했다. 도쿄그랑프리/도쿄도지사상과 최우수감독상으로 무대에 오른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짐에도 단출한 소감을 전했다. “이 작은 영화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하다. 지난 10일간 많은 영화를 즐기면서 봤다. 그리고 도쿄라는 이 멋진 도시에 수많은 영화적 동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가쓰카 교조 배우와 나도 여러분의 동료가 되고 싶다. 계속해서 영화를 응원해달라.” 반면 12년 만의 주연작으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나가쓰카 교조는 무대에서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폐막식에 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놀랐다. <Teki Cometh>는 노년에 홀로 사는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는 주변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는 남자다. 하지만 나는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내 주변에 아군도 있다고 생각한다.
곧 은퇴할 줄 알았는데, 조금 더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뭉클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폐막사를 전한 안도 이사장의 말대로 올해 영화제는 게스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영화제를 찾은 해외 게스트는 2581명, 게스트 출연 행사는 178개로 2천명의 해외 게스트가 169개의 행사를 치른 지난해와 비교하면 점진적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올해 영화제를 찾은 총관객수는 6만1576명으로 7만4841명이었던 지난해에 비해 다소 줄었다. 올해도 이어진 한국영화의 부재는 아쉬움과 의아함을 남겼다. 한국영화의 부재에 대해 A프로그래머에게 묻자 “앞으로 2년 안에 경쟁부문에 한국영화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란다”라는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 올해도 많은 가능성과 과제를 동시에 얻은 도쿄영화제는 10일간의 축제를 마무리하며 내년 가을에 돌아올 것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