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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주어진 것, 구체성 - <수유천> 홍상수 감독에게 듣는 작업 방식
정리 이우빈 2024-09-19

홍상수 감독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진행한 관객과의 대화 중 일부 내용을 의역하고 순서를 재구성하여 전한다. 그의 작업은 조금씩 달라 보이되 크게는 한결같다. 잘 알지도 못할 것은 잘 알지 못한 채로 놔두는, 하지만 지금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림없이 맞다고 생각하는 구체적이고 자의적인 해방감, 그리고 끝내 ‘주어진 것’만 받아들이는 태도를 견지한 채 <수유천>을 완성했다.

- 이전 작품들과 <수유천>이 다루는 사랑은 여러모로 달라 보인다. <수유천>으로 말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가끔 무언가를 아주 강하게 느끼고, 그 느낌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는 것. 하지만 사랑이란 신비를 정의하는 건 다소 쓸모없는 일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사랑을 개념화하려고 늘 노력해왔고 그것에 성공하면 우리가 더 자유롭고 확신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올바른 정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말과 개념과 고정관념과 두려움과 싸우면서 그 앞에 펼쳐진 끝없는 길을 그저 계속 가야만 하는 것 같다. 때로는 하늘과 빛이 그 길을 도와주기도 하고. 아무튼 말이 너무 길었던 것 같은데. (웃음) 그 개념을 정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결론이다.

- <수유천>의 촬영은 어떻게 진행했나.

예전에는 촬영 당일의 이른 아침에 대본을 썼는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전날에 쓰는 편이다. 어떻게 하면 다음날 촬영의 흐름을 잘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전날에 쓴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쯤 너무 피곤하지 않은 선에서 촬영을 마친다.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가서 촬영본을 편집해야 내가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다음 날엔 조금 쉬다가 4~5신 정도의 대본을 쓴다.

- 촬영 기간에 편집까지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쓰지 않는 장면이 얼마나 되는지.

신을 기준으로 하면 99% 사용한다.

- 그렇다면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에 충분히 찍었다고 느끼는 시점이 있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났구나’라는 100%의 확신이 든다. 그때 촬영을 멈춘다. 보통은 영화를 7~8일 정도 찍는데 <풀잎들> 때는 3~4일째의 편집을 하다가 영화가 끝났다는 걸 깨우치고 그만 찍었다. 그 끝이라는 건 꽤 분명하게 다가와서 촬영 하루, 이틀 전에 알게 된다.

- 굉장히 미니멀한 촬영 환경과 카메라를 택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의 기질 때문인지 늘 소수의 크루를 원해왔다. 평소 화가들의 작업 방식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혼자 일하고 매일 일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이 카메라는 10년 전쯤 함부르크에서 산 작은 카메라이고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좋아서 계속 쓰고 있다.

- 영화마다 여자주인공이 담배를 피운다거나, 소주, 맥주가 점차 막걸리, 와인으로 바뀌는 설정 등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이제 내가 많이 늙은 탓에… 소주는 너무 독해서 막걸리를 마신다. 아무튼 영화 속 인물들이 하는 대사의 의도는 감독이나 작가의 의도가 아니고, 그런 요소들은 아주 구체적(concrete)으로 배치된 것들이다. 그렇게 어떤 고정관념과 고정관념이 아닌 것들을 적절히 혼합하면 구체적인 것들은 계속 구체적인 것이 될 뿐 추상적인 것이 되진 않는다.

- 그렇다면 구체적인 것들을 모아놓은 <수유천>의 전체적인 주제는 무엇인가.

난 주제나 메시지로 시작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용납하는 주인공이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구체적인 길 같은 것이다. 더하여 다른 캐릭터들의 성질, 어떤 장소, 그날 하늘이 허락한 날씨가 있다. 이 세개의 요소가 내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내가 내게 허용하는 ‘주어진 것’이다. 굉장히 이상한 방식이다. 하지만 당신의 의도가 너무 명확할수록 모든 것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반면에 당신이 어떠한 의도나 목표나 메시지나 주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아마 당신이 혼란스럽고 길을 잃었으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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