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거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정치 마니아’들에게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는 흥미진진한 이벤트로 가득한, 설레는 시간이다. 지난 7월 공화당, 8월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공화당 전당대회는 도널드 트럼프의 막강한 팬덤을 십분 활용한 트럼프의, 트럼프를 위한 거대한 쇼였다. 반면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선후보를 카멀라 해리스로 급히 바꾼 초유의 사태 탓도 있겠지만) 당의 단합은 물론 트럼프는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한데 모으기 위해 정교하게 연출된 무대의 연속이었다.
많은 사람이 최고의 연사로 미셸 오바마를 꼽았다.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Do Something!”처럼 입에 착 감기는 구호는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법이다. 사랑하는 가족, 이웃과 함께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뭐라도 하자!’는, 아드레날린이 솟아나는 외침이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다양성을 강조한) 책은 위험하니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면서 반자동소총은 얼마든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게 자유라고 믿는 이들의 모순을 꼬집었다.
민주당이 2024년에 자유를 부르짖는다는 점은 생각해보면 꽤 참신하다. 원래 특히 정부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하고, ‘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날 건드리지 마!’라며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한 쪽은 공화당이 아니던가? 민주당이 내세운 자유는 좀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을 누구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회, 또 누구나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도록 모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 적극적인 자유였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조지 클루니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의 인터넷 기사 캡처.
2024년 대선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는 바람에 예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간의 관심도 초여름부터 뜨거웠다. 시발점은 지난 6월27일 진행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TV토론이었다. 원래 TV토론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후보를 정식으로 추대한 다음 9월 혹은 10월에 여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두 후보가 관례를 깨고 6월에 한번 맞붙기로 합의해 애틀랜타에서 <CNN>이 주관하는 토론이 열렸다. 토론 내내 바이든은 도저히 두둔하기 어려운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몇번 했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의 말실수가 이어졌고 제대로 끝을 맺은 문장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4년 전 토론 때는 계속 말을 자르고 끼어들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트럼프가 바이든 혼자 말을 더듬고 중언부언하다 무너지도록 가만 내버려뒀을까?
민주당은 초비상이 걸렸다. 이미 올해 초부터 50개 주를 돌며 후보를 추대하는 예비선거를 거의 다 치른 이후였다. 그렇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바이든이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주지사나 상·하원의원 등 기성 정치인들은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재선에 나서는 현직 대통령에게는 당내에서 도전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어겼다가는 자칫 정치 인생이 끝날 수도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해리스를 지지하는 백인 아저씨 모임' 발족식 공고문.
그 대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이들이 바로 민주당에 정치자금을 내는 후원자들, 소위 ‘큰손‘들이었다. 그중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연예인들도 있었다. 조지 클루니는 아예 <뉴욕타임스>에 “나는 조 바이든을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후보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바이든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아니, 연예인이 정치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관여한다고? 클루니가 왜 여기서 나오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나락 퀴즈쇼>의 단골 소재인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민주당에 많은 돈을 후원해온 큰손들은 너도나도 바이든의 재선 도전에 우려를 표명했고, 클루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도 그 대열에 동참했을 뿐이다.
다소 식상한 표현이지만 미국 선거는 쩐의 전쟁이다. 요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열면 온통 정치 광고뿐이다. 공식 선거기간이 따로 없는 미국은 선거 이튿날부터 다음번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TV와 인터넷에 써야 하는 광고비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땅덩이는 좀 큰 나란가. 핵심 경합주 7곳의 인구만 6100만명이며, GDP는 독일과 맞먹는다. 여기에 전국에 지역 사무소 열고, 집집이 문 두드리며 유세하고 전화 돌릴 선거운동원, 자원봉사자를 모으는 것도 다 돈이다. 선거 열기가 고조되면 여론조사 지지율만큼이나 누가 더 후원금을 많이 모았느냐가 뉴스가 된다. 돈이 많다고 선거에서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지만 돈이 떨어지면 웬만해선 선거를 완주하기 어렵다. 그래서 후보들이 언론 인터뷰나 현장 유세보다도 더 신경 쓰는 행사가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후원 행사인데, 여기서 조지 클루니 같은 유명 연예인이 또 등장한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은 주요 후보에게 직접 후원도 하지만 본인이 마당발인 경우 기업인을 포함한 ‘부자 친구’들과 유력 정치인들을 이어주기도 한다.
왜 할리우드는 민주당을 지지하나?
조지 클루니가 정치에 유독 관심이 많은, 특이한 셀러브리티는 아니다. 오히려 배우나 가수, 심지어 스포츠 스타에 이르기까지 미국 연예인들은 대개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밝히고 선거에서도 특정 이슈나 후보를 지지한다. 민주당 전당대회에도 존 레전드, 줄리아 루이스 드레퓌스, 민디 케일링, 케리 워싱턴 등이 축하 공연을 하거나 연설을 하거나 행사를 진행했다. 비욘세는 아예 바이든이 대선후보 자리를 해리스에게 물려준 이튿날, 자신의 노래 <Freedom>을 해리스 캠프가 테마곡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어 같은 곡을 소셜미디어 광고에 무단으로 입힌 트럼프 캠프에는 당장 멈추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트럼프 캠프는 곧바로 해당 광고를 삭제했다. 트럼프 캠프는 영화 <타이타닉>의 삽입곡 <My Heart Will Go On>을 도용했다가 셀린 디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거절당한 데 이어 밴드 푸 파이터스의 노래 <My Hero>를 유세 현장 배경음악으로 썼다가 또 거절당했다. 푸 파이터스는 트럼프 캠프에서 저작권료를 받으면 그 돈을 모두 해리스 캠프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연예인 중에는 유색인종이나 여성이 많은데, 그렇다면 연예계의 백인 남성들은 어떨까? 물론 트럼프를 지지하는 연예인도 있겠지만 수나 기부금을 놓고 봤을 때 할리우드에서는 민주당 지지세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말 그대로 아저씨(Dude) 역을 맡았던 제프 브리지스를 포함해 유명 백인 남성배우들은 아예 ‘해리스를 지지하는 백인 아저씨 모임’(White Dudes for Harris)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줌으로 진행한 콘퍼런스 콜에서 “아저씨들이여, 솔직하게 나서서 해리스를 지지하자”라고 독려했고, 그 자리에서 수백만달러를 모금했다.
할리우드가 민주당을 선호한다는 건 선거자금 데이터에서도 드러난다. 애덤 보니카 스탠퍼드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의 논문 ‘시장의 정치 이념 분포’에 따르면(아래 사진 참조), 미국 기업들이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디를 지지하느냐, 어디에 후원금을 더 많이 내느냐는 산업군에 따라 갈린다. 할리우드가 속한 엔터 업계는 학계, 언론계, IT 업계와 함께 왼쪽(민주당)으로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반대로 농업, 부동산, 건설업, 에너지 분야 기업들은 공화당을 더 많이 후원해 그래프의 오른쪽이 삐죽 솟아 있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뒤로도 이런 추세는 대체로 그대로다.
그렇다면 왜 할리우드에선 민주당 지지세가 강할까? 변호사들이나 금융업처럼 동종 업계 안에서 두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고루 나뉘지 않은 걸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거를 바라보는 배우와 연예인들이 한 말을 토대로 추측해보거나 영화라는 예술과 작업의 본질을 떠올리면 몇 가지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트럼프 지지자를 찾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다양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카메라로 담아낸 극이라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성은 핵심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양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부터 속에 있는 생각까지 아우른다. 인종, 성별, 출신 국가는 물론이고, 누구를 사랑하는지(성적 지향), 무엇을 믿거나 믿지 않는지(종교), 가치관, 습관, 기호까지 다 포함된다.
예술은 인간의 복잡한 면면을 포착해 담아내는 작업이다. 영화도 예술의 한 장르이므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인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런 믿음을 자연스럽게 체화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할리우드다. 그런데 트럼프가 주장한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운동은 다양성과 거리가 먼 구호로 가득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하는 세력을 대변하는 트럼프는 사실상 백인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으로 보일 만한 구호를 매일 외친다. 할리우드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이 절반이 안되는 ‘다양성의 세대’인 Z세대에서 트럼프가 특히 인기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지난해 할리우드 작가들로 구성된 미국 작가조합은 주요 할리우드 제작사를 상대로 벌인 파업에서 귀중한 승리를 거뒀다. 인공지능이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 미칠 영향을 빠르게 파악해 협상을 주도한 작가조합의 전략도 물론 주효했지만 배우들이 연대 파업에 나선 것도 제작사들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 한편을 만드는 데 수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 노동이 든다. 이 자명한 사실을 매일 몸소 체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또한 할리우드다. 해리스의 민주당과 트럼프의 공화당은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도 정반대다. 트럼프는 얼마 전 일론 머스크와 인터뷰 중에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속 시원하게 다 잘라버렸다”라며 머스크를 극찬했다.
2024 대선 캠페인을 영화로 만든다면
해리스는 바이든이 그동안 모은 선거자금을 그대로 물려받아 선거를 치르고 있다. 선거자금에서는 트럼프의 공화당보다 늘 앞섰다. 선거자금은 물론 중요하지만 돈은 표가 없다. 미국 선거제도도 다른 민주주의국가와 마찬가지로 1원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원칙이 적용된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면 한동안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후보와 정당 지지율이 오르는 컨벤션 효과가 나타난다. 컨벤션 효과가 어느 정도 걷힌 9월1일 현재, 해리스와 트럼프의 지지율 여론조사는 매우 근소한 차이를 보이며 초박빙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보다) 선거자금을 덜 모으고 훨씬 덜 쓰고도 짜릿한 승리를 거둔 기억이 있다. 사회의 주류와 엘리트들에게 ‘무시당한’ 이들의 절망과 오랜 세월 쌓인 분노를 공략해 만들어낸 극적인 승리였다. 특히 중서부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때 제조업을 기반으로 잘나가던 곳에 살던 노동자들은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여기에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 위기’까지 겹치면서 절망의 죽음에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전락했다.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트럼프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뽑은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J. D. 밴스도 바로 그런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다. 밴스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는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됐고,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돼 호평을 받았다.
올해 해리스와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어떤 결말이 나올까? 선거란 냉정한 승부의 세계이기도 해서 ‘졌잘싸’의 메시지를 담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영화는 만들기 쉽지 않다. ‘영화 같다’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에이, 영화도 이렇게 쓰면 욕먹지!’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이번 미국 대선에선 정말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해리스와 트럼프 캠프 중 어느 쪽에서 열심히 모아둔 필름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버려질지는 앞으로 남은 두달여의 시간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