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30주년. 강산이 족히 세번은 변했을 시간이고 신생아는 자라 사회인이 되었을 시간이다. 영화의 연표를 기준 삼으면 <명탐정 코난>은 <쇼생크 탈출> <포레스트 검프> <펄프 픽션>과 동갑인 셈이다. 위 영화를 보고 꿈을 키운 영화인이 다수이듯 <명탐정 코난>을 읽으며 예술의 길에 첫발을 디딘 창작자들도 분명 다수일 것이다. 영화감독, 만화가, 의료인 등 <명탐정 코난>을 사랑한 9인에게 그들이 <명탐정 코난>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관해 들었다.
오세연 감독(<성덕>)
초등학생 때,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가 무엇인지 하나도 몰랐다. 우리 집 TV엔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채널이 다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언니와 내가 애니메이션을 볼 시간에 책을 더 읽었으면 하는, 엄마가 내린 나름의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개편으로 인해 TV 채널번호가 바뀌는 바람에 그토록 궁금해하던 <투니버스> 채널을 볼 수 있게 됐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3등신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코난’이었다. 안경 뒤로 숨은 매서운 눈빛과 나비넥타이를 꼭 붙잡고 읊어대는 추리 내용에 집중하다보면 그 애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엄마의 반응이었다. 몰래 <명탐정 코난>을 보는 우리를 혼내기는 커녕 오히려 반가워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만화책으로 코난을 즐겨봐온 선배였다. 덕분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설정 같은 것을 옆에서 알려주곤 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게다가 코난을 볼 때면 왠지 조금 똑똑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명탐정 코난: 천국으로의 카운트다운>을 좋아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장미가 시계 없이 정확하게 카운트다운을 하던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어두운, 늘 침착하고 성숙한 장미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마음속으로 30초를 세고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체크하는 놀이를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성인이 된 이후, 떠도는 이야기로 코난의 주변 인물들의 실체와 결말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잊어버렸다. 코난이 계속 어린아이의 모습이어야만 나도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영원히 결말을 모르고 싶은, 내가 좋아했던 유일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명탐정 코난>.
이종범 만화가(<닥터 프로스트>)
아오야마 고쇼 작가의 오랜 팬이었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 이전부터 작가의 작품들을 꾸준히 따라 읽으며 좋아했다. <명탐정 코난>은 드문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그랬듯, 한 세대 전체가 기억하는 ‘풍경으로서의 만화’가 되는 작품은 흔치 않다. 긴 세월 동안 사랑받아왔다는 점에서 여러 세대를, 독자와 작가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좋은 윤활제 역할을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성희 감독(<승리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대학교 1학년 때, <명탐정 코난> 첫 한국 단행본이 발간됐다. 단골 만화책 대여점 아저씨가 새로 나왔다며 권했던 기억도 난다. <명탐정 코난>은 내가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만난 작품인데, 놀랍게도 아직 그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다. 수십년째 새 작품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의 팬들이 생겨난다. 그 시절 대여점에 꽂혀 있던 수많은 만화책 중, 내가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은 오직 단 하나, <명탐정 코난>뿐이다. 부디 은퇴는 내가 코난보다 늦기를….
한이 <계간 미스터리> 편집장
<명탐정 코난>은 은밀히 추리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 도서 대여점 사장님과 안면을 터서 신간이 들어오면 뒤로 은밀히 빼돌린 책을 제일 먼저 받곤 했다. 물론 두세 시간 안에 얼른 읽고 반납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어, 집에 가지도 못하고 뙤약볕에 앉아 꿀을 빠는 벌처럼 핥듯이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가가 되고 미스터리 전문 잡지의 편집장이 된 지금까지도 <명탐정 코난>에 대한 선망은 여전하다. 만화는 물론 여러 종의 스핀오프, 노벨라이즈, 애니메이션, 극장판, 게임 등으로 작품의 파급력은 연재 30년 동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으며, 하나의 빼어난 콘텐츠가 얼마나 다종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모범 사례가 됐다. 10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부침을 반복하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 <명탐정 코난>처럼 핵폭탄 같은 파괴력을 가진 작품이 간절하다.
천선란 소설가(<천 개의 파랑> <어떤 물질의 사랑> <나인>)
부모님이 사는 본가에는 <명탐정 코난>이 74권까지 있다. 어렸을 적 만화방 대여점 딸이 꿈이었던 내 소원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뤄주기 위해 엄마가 어느 날 즐겨 읽던 <명탐정 코난> 30권을 사왔고, 그 이후로 책이 나올 때마다 사는 게 취미가 되었다. 물론 74권에서 멈췄지만. 책과 달리 만화책은 구석에 그려진 카메오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특이한 습관이 있는 나는 만화책 1권을 다 읽는 데 보통 2시간을 소요한다. 그런데 코난은 지문과 대사량이 꽤 많은 편이어서 한권을 펼치면 꼼짝없이 3시간을 망부석이 되어 소파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배운 게,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가락에 미리 본드를 발라놓으면 좋고, 청산가리에서 나는 맛은…. 독립을 시작한 지금, 슬슬 만화책 자리를 마련해둬야 하지 않을까, 집에 있는 코난도 데려오고, 나머지 권도 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보니 <명탐정 코난>이 104권까지 나왔구나. (104권의 출간 동시 해외 번역과 베스트셀러라니, 정말 부럽다.)
김형규 문화예술창작의료인·만화애호가
VJ 활동과 치과대학 생활을 병행하던 1996년에 만화 <명탐정 코난>을 처음 접했다. 만화를 사랑하고 글자 그대로 만화를 ‘섭취’하는 내게, <명탐정 코난>은 맹렬한 애정과 진지한 비판 모두를 보내게 되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어떤 만화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만난다 해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싶고 또 어떤 주인공들은 버선발로 달려가 손잡고 사진도 함께 찍고 싶다. 그런데 <소년탐정 김전일>의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의 코난만큼은 멀리하고 싶다. 이 두 친구는 살면서 한번도 접하기 힘든 살인사건과 범죄를 끼니 챙기듯 심드렁하게 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난 곁에 죽음의 그림자가 그늘진 이유는 이 친구가 자신의 명탐정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몸소 범죄를 유발하는 악의 사신이 아닐까 하는 못된 상상도 하게 된다. <명탐정 코난>을 사랑한다. 호호할아버지가 돼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명탐정 코난>을 만나길 바란다. 추리엔 승패도, 상하도 없으니까. 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이니까.
백재호 감독·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그들이 죽었다> <시민 노무현> <붉은 장미의 추억>
1999년 오랜만의 세기말, 곧 다가올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이 섞여 시끌벅적한 서울의 밤거리, 그 흔한 네온사인 간판도 없는 불 꺼진 낡은 건물, 같은 차림을 한 남성 수십명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칸막이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톡- 톡- 조심스럽게 책상 칸막이를 두드리는 한 남자. 잠시 적막이 흘렀다가, 사각사각- 이내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 옆자리 남자가 살짝 기지개를 켜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책상 밑으로 뭔가를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 역시 옆자리 남자가 준 물건과 동일한 형체의 물건을 건넨다. 심호흡하고 옆자리 남자가 건넨 물건을 확인하는 남자. 그것은 바로 <명탐정 코난> 신간이다. 잔뜩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고2의 나! 당시 신이치와 동갑이었던 나는 이제 코고로 탐정의 나이도 훌쩍 넘어버렸고, 독서실 친구 얼굴도 검은 조직처럼 희미해졌지만, 코난과 친구들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30년이나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다니! 저주인가 축복인가!?
이태동 감독(<좋좋소>)
<명탐정 코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투니버스>라는 만화 채널이다. 내가 <투니버스>를 보는 이유의 대부분은 코난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동네 형들은 코난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만화책으로 먼저 봐야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있다느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도 코난을 떠올리면 코난을 더빙한 성우의 연기와 목소리를 통해 좀더 입체감 있게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매번 범임을 색출해나가는 작업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함께했다. 내 추리력으로는 대부분의 범인을 찾는 데 실패했던 것 같다.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말려>는 다른 애니메이션과 달리 처음부터 시청해서 주인공의 서사를 쌓지 않고도 어느 편을 봐도 쉽게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지금 내가 작업하고 있는 숏폼 웹드라마, 뉴미디어 콘텐츠가 서사의 연속성이 있는 시리즈물이 아니라 한편 한편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 수 있도록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추리물이라는 장르가 마니아층이 두텁고 성인들이 즐기던 장르를 어린 코난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며 애니메이션을 보는 어린이들에게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작품인 것 같다.
조예은 소설가(<적산가옥의 유령> <입속 지느러미>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명탐정 코난> 2기 36화, <사라진 흉기 사건>에서 범인은 피해자가 옷걸이를 던져 욱하는 마음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어이없는 살해 동기로 유명한 에피소드이죠. 현실적이지 않다거나 작가가 스토리를 짜기 귀찮았던 것 아니냐는 등의 반응도 있었다. 나는 사실 <명탐정 코난>보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즐겨보았지만 모든 추리 만화의 살해 동기를 통틀어 이 에피소드만큼 현실적인 동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실제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나요? 사연 있는 범인의 치밀한 계획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이기심과 악의, 타이밍이 비극을 일으키죠. 소설을 쓰는 요즘 자주 36화를 떠올린다. 20년 전 12살이었던 내가 작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코난의 내용이 이상하다고 구시렁대며 터덜터덜 학원에 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