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도 있겠구나.” 김화진은 소설로부터 타인의 가능성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쓴다.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 <나주에 대하여>로 등단한 김화진은 뜻밖의 관계에까지 각별한 탐구심을 발휘하는 내면의 서술자다. ‘일하고 우정하는’ 젊은 여성들의 마음속 웅덩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그는 남자 친구의 전 애인을 회사 동료로 마주하는 <나주에 대하여>, 네명의 20대 여성들이 서로의 마음을 횡단하는 궤적을 그린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경로>를 지나 첫 장편소설 <동경>에 이르렀다. 인형 리페인팅이라는 독특한 직업 세계에서 만난 세명의 30대 여성이 서로의 깊이와 이면의 두고 신중한 접합 지점을 모색해나가는 이야기다. 편집자에서 유튜버, 체온을 머금은 듯한 감정 묘사로 주목받는 소설가로 역할을 확장하는 사이 그의 작중 인물들도 함께 30대를 통과하며 성숙해졌다. 지난 6월, <동경>과 함께 칙릿 장르에 도전한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를 연달아 발표한 김화진을 만나 미세하지만 끊임없는 진폭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소설가의 마음을 물었다.
- 작가 김화진 이전에 민음사 유튜브 채널로 유명세를 탄 편집자 김화진이 알려졌다. 스스로를 소설가로 정체화한 순간은 언제쯤이었나.
= 등단한 것, 소설가가 된 것.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걸 납득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누가 나를 소설가로 불러줄 때 스스로 머쓱해하지 않았으면 싶어서 나는 소설가가 맞다고, 그것을 객관적인 현상으로서 받아들이자고 한동안 노력했다. (웃음) 첫책 <나주에 대하여>가 나올 때까지도 내 책이 아닌 것만 같아서 정영수 편집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언제나 모든 반응이 조금 늦되다. 빨리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게 맞나, 괜찮은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망설이는 동안 쌓이는 찌꺼기들로 글을 쓰는 것 같다.
- 국문학을 전공하고 편집자가 됐다. 회사를 다니면서 꾸준히 소설을 썼는데 체력을 아껴가며 글 쓰는 과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 신입 땐 너무 긴장해서 회사 다니는 일만으로도 녹초가 됐다. 습작을 쉰 적은 없지만 입사 후 한동안은 진도를 못 내다가 2년쯤 지나서야 정기적으로 쓰게 됐다. 퇴근 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많은 것들의 증거다. 메모해둔 것이 제법 있고, 거기서부터 이어서 쓸 수 있을 것 같고, 결정적으로 집에 가서 눕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그러니 소설을 쓴다는 게 좋을 수밖에 없다. 오늘 쓸지 말지는 주로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결정한다. 집 근처 카페 아무 데나 들어가서 쓰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소설을 쓴 날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확실하다.
- 첫 장편소설 <동경>은 인형 리페인팅이라는 일을 중심으로 관계 맺은 세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다. 1부에서는 세 인물(아름, 해든, 민아) 각자의 1인칭 시점으로 마음의 세밀한 결을 서술했다.
= 인물들 각자의 뿌리와 깊이를 세워두어야 관계의 삼각형이 제대로 설 것 같았다. 관계 속의 한 사람이기 이전에 각 개인의 모습은 이러하다고, 그러니까 어쩌면 전혀 친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2부에서 3인칭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이들이 하나의 시간 속에서 흘러가면서 때로 겹치고 또 겹치지 않는 모습을.
- 서로에게 낱낱이 밝히지 않는 은밀한 사정들을 1부에서 먼저 서술한 다음, 2부에서 관계의 구도를 떨어뜨려놓고 바라본다. 어떤 효과를 기대했나. 각 챕터가 계절의 흐름을 담고 있기도 해서 소설집 전체가 미시적인 감정과 거시적인 시간의 흐름을 넘나든다는 느낌을 준다.
= 소설 속에서 인물과 인물이 대화할 때는 사실 말하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인물의 내면 서술을 다 읽고 대화를 접하기 때문에 두 대화 상대가 훨씬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단편에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가 분량상 벅찬데, 장편소설에선 좀더 접근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아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지, 해든이 아빠로부터 받은 영향은 얼마만큼인지 1부의 1인칭 서술에서 충분히 적어둔 뒤에, 2부에서는 그들 각자가 자신의 깊이를 다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차이를 하나의 흐름 속에서 확실히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서로 동경하는 친구들이라면 다 얘기하지 않아도 그것대로 좋은 관계일 수 있다고, 혹은 어쩐지 다 알 것 같아도 모른 척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 나이대 우정의 좋은 면이다.
- 소설집의 제목이 된 ‘동경’의 뜻을 질문하고 싶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동경한다는 감정을 어떻게 해석했나.
=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산다. 그 생각을 세 인물에게 나눈 것이 아름, 해든, 민아다. 세명 모두 이쪽저쪽의 상대를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혹은 ‘저 사람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며 썼다. 누군가에게 어떤 점이 있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찬찬히 생각한 소설이었다.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동경이란 단어를 한번도 제대로 의식한 적 없었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도 발견해나갔다.
- 김화진의 소설에서 친구 되기, 혹은 우정은 왜 이다지도 중요할까.
= 우정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해서? 물론 나는 살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어려웠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할 수 없는 말이 많은 관계가 친구였다. 당신의 어떤 점이 싫다고, 부모에게나 애인에게는 말해버리게 되지 않나. 친구에겐 그게 안됐다. 친구에겐 어디까지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는지 그 어려움을 탐구하는 게 항상 흥미로운 주제였다. 일로 만난 관계, 동료로 시작한 관계가 친구로 접어드는 통로가 신비롭기도 하다. 원래 친구였던 무리가 쪼개지는 과정 같은 것들도. 친구는 내게 그 기한과 깊이가 너무나 다채로워서 계속해서 쓸 게 많은 주제다.
- 작가 김화진은 현실보다 인간관계의 더 나은 가능성을 소설로서 모색한다고 할 수 있을까.
= 적어도 나의 현실에 비교하자면 그렇지 않을까. 소설의 기저에는 결국 내가 있다. 이런 식으로 굴어도 나랑 친구해줄까, 저렇게 행동해도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을 실험해본다. 똑같이 행동해도 그게 누구냐에 따라 미움의 정도와 너그러움이 달라지는 것같이 희한한 마음들을 소설 안에서 적용해보는 것이 재밌다.
- 자신의 내면만큼 타인의 성향과 심정에 대해 골똘히 탐구하는 문장들을 따라가는 것이 김화진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다. 바꿔 말하면 자의식에만 침잠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식적인 환기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 자기가 자기를 몰라서 괴로워하고 타인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과정조차 결국은 다 자기가 좋아서 그러고 있는 거 아닐까. ‘내가 나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조차 그 안에 너무나 소중한 자기가 들어 있는 거라서. 그래도 다른 사람을 거울 삼고 싶다는 마음, 반사된 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확실히 자폐적이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나 자신의 기원에서 찾자면… 내가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아와서 그럴까? 어릴 때 학교에서 줄을 서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맞더라도 쟤한테 줄을 맞춰야 하나 생각하는 어린이였다. 그런 걸 고민하는 애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애는 분명 다르겠지. 나는 말하자면 전자인 어린이로 태어나 안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혼종일 테고.
- 소설의 소재와 장면들, 문장들을 수집하는 평소의 방식이 궁금하다.
= 평소엔 그저 이 시간에 단편소설 하나라도 완성하면 참 좋겠지, 하면서 누워 있다. 생각만 품은 채로 그저 돌아다니거나 뭘 읽기도 하고. 소설 시작 부분이 나열되어 있는 파일들이 잔뜩 모인 폴더가 있다. 여러 덩어리들을 직관적으로 그때그때 모아두고 서로 이어지는 것들끼리 분류해둔다. 서로 합쳐질 수 있겠다 싶은 것들끼리 하루 날 잡아 길게 들여다보게 날 무언가 쓰게 되는 셈이다. 여행을 거의 하지 않다가 최근 들어 조금씩 다른 장소, 풍경에 가 있어보려고 하는데 그때 본 인상적인 것들을 메모로 남기기도 한다. 최근엔 무주산골영화제에 갔다가 들른 테마랜드에 수달이 있다고 썼다. (웃음) 무언가 처음 알게 된 신기함, 인생을 살면서 내가 모르는 게 아직 이토록 많다는 놀라움, 그 밖의 솟구치는 감정들을 적는다.
- 영화기자의 사족을 붙이자면, 소설가 김화진을 제천, 전주, 무주 등 영화제에서 마주친 것만 여럿이다.
= 영화제 탐방도 역시 늦된 편이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 멀리 가보자고, 환기를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다닌다. 얼마 전의 무주는 체육관에서 영화 보는 일이, 그 흰 플라스틱 의자를 보는 것이 참 좋았다. 영화제 여정은 단편소설이 되기에 훌륭한 조건들을 갖췄다. 권여선 작가님의 <삼인행> 같은 소설처럼. 그래서 늘 영화제로 떠날 때 이번엔 소설이 되기를 희망하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결국 ‘아, 이번에도 잘 놀았다!’ 하고 만다.
- 앞으로 새롭게 쓰고 싶은 화두가 있을까.= 누구를 미워해보는 소설도 써보고 싶다. 다각의 관계 사이에서 특별히 밉고 싫은 애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동경>을 출간하고 도서전을 지나면서 유독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최근 들어 지독한 미움이나 싫음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동경>, 200쪽)
지금의 작가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은.“대체로 최신 발표작의 인물이 지금의 나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동경>의 아름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꼭 나 같다. 무언가 좋다고 했다가, 안 좋다고 했다가 이래도 될까 하다가 안될 것 같다고 하면서 자꾸만 스스로 뒤집는 사람. 매번 갸우뚱거리면서 사고의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이 가장 나답다고 느낀다. 글이라는 게 결국 쓰는 사람의 사고의 흐름대로 비슷하게 구조되기 마련인 것 같다. 그래서 바람이 있다면 정반합을 추구하지 않고, 나중에 쾅 하고 무언가 틀렸음을 깨닫게 되더라도 일단 의심 없이 치고 나가는 사유와 문장의 소설을 써보고 싶다.”
요즘 소설 쓰기에 영감을 주는 존재는.“탁구를 치고 있다. 그동안 취미란 게 없는 삶을 살았는데 친구이자 동료인 정기현 편집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둘이 가니까 잘 안 빠지게 된다. 가장 좋은 건 운동을 하면 잠시 정신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끼고 있다는 것. 아직 초보지만 소설에 한 장면쯤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