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영화가 처음부터 예술로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사람들을 경악시킨 이래 한동안 영화는 발전된 기술을 느낄 수 있는 신문물 정도로 취급받았다. 기성 예술가들이 영화의 등장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계급 중심으로 극장 영화가 소비되면서다. <예술의 시대>에 수록된 ‘문학에서 영화로, 또는 대중 속으로 사라진 예술’에서 전동열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는 1910년대부터 영화가 오랫동안 “배우지 못한 사람과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장난의 심심풀이”, “낮은 계급의 문화적 대체물”, “대중을 ‘잠식’해가는 ‘페스트’” 등의 취급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이후에도 영화의 상업성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영화가 순수예술로 대우받지 못하는 장벽이 됐다. 하지만 원래 영화의 비예술성을 주장했던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이나 토마스 만 같은 작가들이 점차 영화가 지닌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 ‘커다란 가능성’을 인식”하고 “문학과는 ‘다른 법칙’을 지닌 독자적 예술이라고 보는 견해”를 보이는 등 다른 양식의 예술, 영화만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의 위상이 미학적, 기술적 측면에서 함께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감독 역시 복합적인 지위를 점하게 됐다. 특히 고유의 영상 언어를 고민하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작가, 예술가, 시네아스트라 부른다.
<화이트 미러> 지난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I 게임 및 영화 페스티벌’에서 공개된 세계 최초의 AI 장편영화 <화이트 미러>는 다양한 참가자들이 각자 제작한 이미지 생성 AI로 구성된 앤솔러지다.
공교롭게도 인공지능의 발전은 100여년 전 기성 예술가들이 던졌던 질문을, 케케묵은 논의인 것처럼 보였던 영화의 예술적 위상에 대한 의구심을 다시 던지게 한다. 영화는 예술인가? AI가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시대에 이 명제를 여전히 고수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역시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거나 예술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거나 인공지능과 인간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선언까지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선뜻 수긍하기에는 아직 불편한 논의들이다. AI 영화와 기성 영화의 경계가 흐려질 때 여전히 인공지능과 인간의 다름을 ‘예술적 영감’에서 찾고 싶다면, 우리는 영화의 위상을 재정의해야 한다. 아니, 영화는 마땅히 예술이 맞지 않은가? 이렇게 발끈하는 시네필이라면 AI 영화산업의 급성장은 영화와 인간 양쪽 모두의 ‘특별함’을 위태롭게 한다. 인공지능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고 심지어 배우의 연기도 대체한다는 최근의 뉴스들이 유독 두렵게 다가오는 것은 그래서다.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이 그랬듯이 AI 영화는 결국 받아들여야 할 흐름일지 모른다. 영화계는 AI를 새로운 기술로 인지하되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거나 혹은 제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6년 인간 영화감독 오스카 샤프와 AI 공학자 로스 굿윈은 인공지능 벤자민을 개발해 단편영화 <선 스프링>의 시나리오를 쓰게 했다. 당시 벤자민이 만든 시나리오는 인간의 그것과 너무 다른 작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관객이 단번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인공지능이 쓴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죽지 않는 뇌>(1962)와 <지상 최후의 사나이>(1964)의 푸티지에 AI를 합성한 <존 아웃>(2018)을 만들었다. 인공지능 벤자민이 각본, 연출, 편집, 음악 등 제작 공정을 수행했지만 여전히 AI가 쓴 시나리오는 기성 영화의 작법을 완전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밖에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시맨>이 로버드 드니로, 알 파치노 등 70대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담아낸 디에이징 기술 역시 AI 기술력의 힘이다. 흥행 예측, 로케이션 추천, 편집, 색보정 등 프리프로덕션 및 포스트프로덕션 다방면에서 인공지능은 효율적인 툴을 제안한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AI 영화 경쟁부문’을 신설했다. 매년 새로운 VR·XR 영화를 소개하는 등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고 관객에게 소개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영화제가 올해 선택한 키워드는 ‘인공지능’이다. 영화‧영상 분야에 AI 기술 도입을 활발히 모색하고 있는 이들을 초청한 BIFAN+ AI 국제 콘퍼런스도 개최한다.
영화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인공지능이 보조적 도구가 아닌 위협의 대상으로 다가온 분기점은 챗지피티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방대한 영화 데이터를 학습하고부터다. 세계 최초 AI가 연출을 맡은 <세이프 존>(2023)은 오픈AI가 각본을, 챗지피티가 연출을 맡았다. 챗지피티는 제작진의 요청에 따라 카메라와 피사체의 위치, 연기 연출, 조명, 소품 등 연출 전반에 대한 촬영 리스트를 산출해냈다. 스토리보드는 AI 기반 이미지 생성 도구 달리와 미드저니를 통해 만들었다. 인간 배우의 신체 연기를 스캔한 정보가 있으면 다른 나이대는 물론 각국의 언어로 더빙한 영상도 제작할 수 있다. 단순히 인간이 입력한 값에 상응하는 산출값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생성이 가능한 생성형 AI는 기계가 대체할 수 없다고 믿었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미국작가조합(WGA)은 생성형 AI가 시나리오작가들의 저작물을 대가 없이 학습하는 것에 반대하는 파업에 들어갔고,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은 배우의 신체 정보를 스캔한 인공지능이 그들의 초상권을 무한정 영화에 쓸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며 역시 단체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AI를 활용한 시나리오 집필을 규제하는 등 새로운 규칙을 포함한 잠정 합의안을 도출한 후 파업을 종료했다. <악마와의 토크쇼>는 WGA와 SAG-AFTRA 파업 이전에 촬영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AI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불매운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때문에 “제작자, 작가, 모든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는”(<할리우드 리포터>, AI 소프트웨어 시스템 지나리오의 설립자 데이비드 데페니) 일도 벌어진다. 올해 1월 발표한 엔터테인먼트 산업 리더 3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분의 3은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없애거나 감소시키거나 또는 통합시킬 것”(<할리우드 리포터>)이라 답했다. 컨셉 아티스트, 음향 엔지니어, 성우, VFX 등 후반작업 공정이 특히 취약하다.
지난해 미국작가조합(WGA)과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의 파업 시위.
하지만 문학에서 영화로, 극장에서 TV로, TV에서 비디오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케이블TV에서 OTT로 옮겨온 매체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결국 인공지능 시네마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가 될 것이다. 다만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올드 미디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듯 인간 고유의 특성이 AI 영화와 구분되는 영화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믿음을 걸어볼 수 있다. SF 작가 테드 창은 지난 6월 한국에서 열린 ‘제3회 사람과디지털포럼’의 기조연설자로 참석해 “현재 거대언어모델이 하는 일은 모방에 불과”하며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인간과 달리 인공지능은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나 예술가적인 의도”가 없기 때문에 인간 예술가를 대체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AI 영화는 우리가 믿었던 영화의 종말을 고하는 현상이 아닌, 인간과 인공지능의 태생적 차이와 우리가 신뢰했던 영화만의 예술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를 증명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만드는 시네마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