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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지옥에도 도파민이 필요하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있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는 없는 것
송경원 2024-06-06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는 스크린에 물리적으로 구현 가능한 시청각적 쾌감, 그 지평선 너머를 향해 질주해온 시리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 신작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보여주는 것’만큼 ‘들려주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 ‘매드맥스 사가’라는 부제답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역사가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닫는 형식은 마치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퓨리오사’라는 전설을 설화로 풀어낸다. 바로 이 점이 <퓨리오사>의 빼어난 성취이자 동시에 아쉬운 점이다. <퓨리오사>는 (예상 밖으로) 서사적인 완성도가 탁월해진 반면 (기대보다) 직관적인 쾌감은 옅어졌다. 한마디로 전작들과 달리 도파민이 무작정 분출되진 않는다.

광기에서 이성으로

어쩌면 이 아쉬움이야말로 조지 밀러의 명확한 의도로 보인다. 영화 말미 복수의 천사로 거듭난 퓨리오사(애니아 테일러조이)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를 사냥한다. 목격자 한명 없는 사막 한가운데, 퓨리오사 앞에 무릎 꿇은 디멘투스는 연극처럼 멋들어지고 장황한 대사들을 쏟아낸다. “난 천국의 축복도, 지옥의 고통도 두렵지 않다”느니, 자신도 퓨리오사처럼 사랑했던 모든 걸 잃고 허망했다느니 하는 사연을 늘어놓던 디멘투스는 이윽고 자신과 퓨리오사를 동일시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설명’해준다. “넌 나야. 이미 죽어 있어. 살아 있음을 느낄 자극을 찾잖아. 매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지.” 더 큰 자극. 더 기발한 액션. 더 강한 카타르시스를 향한 갈망. 이것이야말로 <매드맥스>시리즈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미쳐버린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생각할 의지를 포기하거나 함께 미쳐버리거나. <매드맥스> 속 인물들은 무언가에 미쳐 있다. 임모탄 조(러치 험)는 정상적인 핏줄을 남기는 데 미쳐 있다. <퓨리오사> 후반부의 퓨리오사는 복수에 미친다. 디멘투스는 스스로 자극에 미친 인간임을 고백한다. 이 순간의 디멘투스는 <다크 나이트>의 조커라도 된 양 퓨리오사의 거울처럼 마주 서기를 한다. ‘그저 제멋대로 황무지를 누비는 사람’으로서 ‘자신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줄’ 리틀 D(디멘투스)를 기다렸다는 디멘투스의 고백은 자못 철학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서사적으로 <퓨리오사>는 짜임새와 전개, 결말까지 안정감 있는 영웅 설화를 쌓아나간다. 낙원에서 떨어진(납치당한) 천사가 황무지에서 생존을 배우고 탈주를 감행한 끝에 복수의 화신으로 거듭나더니 마침내 복수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이야기. <퓨리오사>의 초반부가 다소 정적이고 숨기고 움츠리는 쪽으로 액션보다 정서를 쌓아나가는 건 당연한 사전작업이자 ‘퓨리오사’의 본질이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달리던 <분노의 도로>가 이상하고 뒤틀린 서사에 가깝다. 엄밀히 따지면 정석은 <퓨리오사>쪽이다. 당최 행동 패턴을 짐작할 수 없었던 허술한 빌런 디멘투스는 이미 죽은 존재로서 더 큰 자극만을 갈구해왔음을 밝힐 때 그는 비로소 광기가 의인화된 존재로서 영웅, 구원자, 낙원의 천사 퓨리오사의 대척점에 설 자격을 얻는다.

이렇게 정리하면 흉내낼 수 없는 액션의 완성도에 철학적 깊이까지 갖춘 명작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렇다. <퓨리오사>를 두고 평범한 결과물이라 실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조지 밀러가 다시 구현한 이 미쳐버린 세계의 에너지는 여전히 경이롭다. 다만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 종종 엔진을 멈추는 이번 작품은 (당연한 말이고 응당 그래야 하지만) 어딘지 퓨리오사를 닮았다. 미쳐버린 세상에서도 복수에 미치지 않고 낙원을 꿈꾸는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영웅. 그게 <퓨리오사>의 서사에 박수를 보내고 경탄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이유다. 이 영화는 지나치게 정상이다.

아드레날린 중독을 거부한 복수극, 장엄하고 차갑게

애초에 조지 밀러 감독은 역사가의 입을 빌려 처음부터 영화의 방향과 목적을 규정한다. “무너지는 세상의 잔혹함에 우리는 무엇으로 맞서야 할까요.” 그 결과 도파민 시대에 해독제로서의 깊이에 다다르지만 반작용도 있다. 이 복수극엔 아드레날린이 돌지 않는다. 퓨리오사는 분노를 연료 삼아 스스로의 몸마저 불사르는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 ‘천사’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엔딩에서 디멘투스의 결말은 구전을 통해 신화로 거듭난다. 총으로 머리를 관통당하는 디멘투스를 먼저 보여준 영화는 다른 버전의 결말도 보여, 아니 들려준다. 바싹 말라버린 디멘투스가 잭과 퓨리오사의 은밀한 낙원에서 나무의 양분이 되어버린 몽타주는 그야말로 신화적이다. 광기를 양분 삼아 피워낸 열매를 들고 낙원으로 향하는 디스토피아의 구원 신화. 그렇게 이야기가 신화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의 재료가 되어버린 광기다.

사실 <매드맥스> 시리즈의 본체는 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성과 상식의 외곽선을 알리바이 삼아 공인된, 공식적인 미친 짓. 디스토피아 속 절멸된 인간성에 대한 성찰 따윈 그저 결과론적인 부산물에 불과하다. 1979년 <매드맥스>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뿐 아니라 2015년 <분노의 도로>로 귀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도달할 수 없는, 아날로그 액션의 한계치라고 선을 그어둔 안전장치를 발로 차버리는 미친 짓의 흔적들이 영화 곳곳에 묻어 있다. 물론 <퓨리오사>에도 하늘을 활강하는 굴욕자들과의 액션 시퀀스 등 여전히 경이로운 장면들이 있다. 다만 그 광기가 이번엔 제법 익숙하고 정제된 인상이다.

우리가 전율했던 건 <매드맥스>의 세계관이 아니다. 현실과 이성의 경계를 위험하게 넘나드는 영화, 카메라, 감독의 미친 짓에 워보이마냥 열광했다. 정확히는 어디까지가 미친 짓인지 가늠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장면들을 통해 피와 살이 도는 (지옥의) 생동감을 느꼈다. 두프 워리어(속칭 기타맨)가 불을 내뿜으며 트럭 위에서 연주할 때 왜 그래야 하는지, 일말의 효용성이나 개연성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광란의 질주, 에너지 자체를 비이성적으로 형상화한 몸부림일 따름이다. 약간의 과정을 보태 <분노의 도로>에선 거의 모든 장면이 그런 광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맥스(톰 하디)나 퓨리오사(샬리즈 세런)처럼 소수의 제정신인 사람들이 미쳐버린 세계와 투쟁하는 에너지를 동력 삼아 전진하는 이야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광기 혹은 미쳐버린 세상 그 자체다.

반면 <퓨리오사>는 미쳐버린 세상을 배경으로 영웅의 설화를 (보여주는 척하지만 실은) 들려준다. 정상으로 돌아온 이야기는 하늘의 별이나 신화처럼 빛나지만 광기의 매혹, 지옥의 온도를 잃어버렸다. 가짜 광기를 겉옷처럼 걸친 디멘투스의 얄팍함도 여기에 기인한다. 퓨리오사를 돋보이게 할 거울로서 위치를 지정받은 디멘투스는 끝내 조커가 되지 못한다. 장엄한 신화로 거듭났을지언정 심장이 따라 뛰진 않는 ‘설화’ (說話). 엔진 소리는 여전히 요란하지만 (워보이들을 미치게 했던) V8 엔진의 신성함은 어느새 빛이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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