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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이자벨 위페르의 필요 - <여행자의 필요>와 함께 돌아보는 홍상수 영화의 여행자, 이자벨 위페르 역할론과 인터뷰
김소미 2024-05-09

12년에 걸쳐 홍상수 감독과 3편의 작품을 함께한 이자벨 위페르는 더 많은 홍상수 영화를 기다린다. 그는 홍상수 작품의 스타일과 제작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남겨진 ‘알 수 없음’의 영역에도 가뿐히 미소 짓는다. 자신의 마스터를 “가장 미니멀한 제작 방식으로 복잡한 마술을 탄생시키는 대체 불가능한 관점의 소유자”라 수식하는 이자벨 위페르와 <여행자의 필요> 개봉일인 4월24일에 화상 인터뷰로 대화를 나눴다. 얼마 전 가족으로 합류한 신입 고양이 우발라를 소개해준 72살의 전설적인 배우는 커다란 안경과 모닝커피를 준비해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 위페르는 홍상수, 그리고 <여행자의 필요>에 관해 군더더기 없이 긴요한 설명만을 들려주었으며, 촬영 과정 일반에 얽힌 사실들에 근거해 자신의 역할을 묘사했다. 촬영장의 통역을 도맡았고 극 중에서는 이리스가 윤동주 시를 프랑스어로 옮기도록 요청하는 인물인 하진화 통번역가가 이번 대화의 매개자로 동석했다. 유희와 비애, 끈질김과 초연함이 동시에 깃든 <여행자의 필요>를 마주하며, 홍상수 영화의 여행자로서 그동안 우리에게 새겨진 이자벨 위페르의 필요를 되돌아본다.

제작, 감독, 각본, 촬영, 편집 그리고 음악까지 홍상수 감독이 직접 지휘하며 (제작실장 김민희를 포함한) 단 세명의 스태프와 꾸려낸 <여행자의 필요>는 행자로 치면 홀몸의 나그네에 가까운 프로덕션이지만, 극 중 이리스(이자벨 위페르)의 홀연함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프랑스에서 왔다고 알려진, 그러나 출도착을 규정하기 힘든 이 여성 인물의 프로필에 관해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바는 거의 없다. 그가 이방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여행자의 필요>의 이리스는 하루 동안 두명의 한국 여성에게 프랑스어 교사 역할을 한다. 상대의 속마음을 불어로 기록하고, 그들의 연주를 듣다가 자리를 빠져나오고, 강습비를 받아 함께 사는 젊은 남자에게 준다. 이것은 타인의 필요를 우선해 묘사한 이리스이며 당신 자신의 필요로 보건대 이리스에겐 그저 어떤 만남과 헤어짐이 있을 뿐이다. 대화가 잦아들면 그는 한낮의 공원 개울에 맨발을 담그거나, 손님이 드문 시간의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고, 길가의 돌 위에 앉아 있는다. 이리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스토리 차원 너머에서 우리는 그가 “변함없이 고되고, 매일 막걸리에 의존하며 조금의 편안함을 얻”(홍상수 감독이 쓴 시놉시스의 일부)는 상태임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이 ‘고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자벨 위페르는 고됨을 고독으로 바꾸어 말했다. 더 고독해진 것만 빼면, <여행자의 필요>가 자신이 출연한 홍상수 영화 중 가장 웃긴 영화라고도 수식했다. 어찌됐든 <여행자의 필요> 속 이리스에겐 앞서 홍상수 감독과 작업한 두편의 영화들- <다른나라에서>(2011)와 <클레어의 카메라>(2016)- 보다 강화된 비애감이 깃들어 있고 그것은 자신이 믿는 삶의 방식을 지켜내려는 사람의 까다로움과 엄격함과 무관하지 않다. 70대에 접어든 이자벨 위페르에게서 세월을 감지해내는 관객의 감상도 마냥 배제하긴 힘들다. 우리는 이 배우의 육체성과 함께 초월 혹은 가끔 체념처럼 보이는 움직임을 마주한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 모든 것들은 짐짓 사소한 표면을 두르고 있다. 원주(이혜영)가 직장을 곧잘 그만두는 젊은 딸에 대해 불평하자 이리스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대뜸 조언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변신하는 윤리의 실천자

공원에서 원주, 해순(권해효) 커플과 작별 인사를 나눈 직후, 걸어가던 이리스는 사라진다. “아니… 어디 갔어?” 카메라가 패닝하면 길위에 있던 이리스의 뒷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원주는 당혹스러워한다. 갑자기 사라지거나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한 자각, 그로부터 발생하는 놀라움을 홍상수 감독은 구태여 기입(<여행자의 필요> <밤의 해변에서 혼자>)해두는데, 이자벨 위페르의 경우에 그의 사라짐은 또 다른 시공간에서 겹쳐질 캐릭터들을 불러낸다. 이리스는 어디로 갔는가. <여행자의 필요>에서 고무줄로 묶어둔 인덱스카드와 카세트테이프를 쥔 이리스는 카메라를 든 채 휴양지 칸의 지하보도를 건넌다(<클레어의 카메라>). 조그마한 공원 개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이리스는 모항 해변의 파도에 발을 담근 채 ‘아름답다’(<다른나라에서>)고 외친다. 그녀들이 맨발로 걷는 모래바닥의 여정을 따라가면 인국(하성국), 만희(김민희) 또는 안전요원(유준상)과 만날 수 있으며, 돌 위에서 마시는 술은 소주에서 막걸리로 바뀌어간다. <여행자의 필요>를 앞두고 홍상수 감독이 <다른나라에서>의 세 번째 안느(이자벨 위페르)가 입었던 초록색 원피스를 배우에게 다시 입어보자고 제안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결국 똑같은 옷을 입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원피스풍의 의상과 모자를 즐겨 쓰는 스타일이 외양에 있어서도 작품간 인상의 겹침을 이룬다.

세편의 영화에서 느슨한 시각적·구조적인 연속체로 자리 잡은 이자벨 위페르는 근작으로 올수록 더욱 선명해진 윤리의 실천자로서 홍상수 세계를 산책 중이다. 이리스는 집요한 질문(“그러니까 정말로 무엇을 느꼈나요?”)을 통해 상대가 자기 내면의 사실을 마주 보게 하고, 사진을 찍는 클레어는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것”이라고 열띠게 일러준다. 이자벨 위페르는 다수와 구분되는 예외적 존재를 무심히 연기하면서, 보통의 인간들이 돌에 이름을 새기거나 절을 하고, 연주하(거나 뽐내고 싶어 하)는 것을 지켜본다. 정확히는 일련의 분주한 행위들이 진짜 중요한 것으로부터는 비껴나 있음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인의 위치성, 그로 인한 엇갈림과 차이가 주효했던 <다른나라에서>를 지나, <클레어의 카메라> <여행자의 필요>에 이르면 위페르의 목소리로 수행되는 번역의 묘미도 짙어진다. 이송(김승윤)과 원주가 능숙지 않은 영어로 끄집어낸 감정을 이리스가 통찰력 있고 시적인 불어 문장으로 바꿀 때, 고백의 내용은 더이상 발화자의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개의 언어와 중층의 번역을 통해 스크린에 새겨진 한글자막은 학생의 내면이라기보다 차라리 선생인 이리스 자신의 윤리라고 해도 좋다. 볼펜 한 자루가 초록색 테이프를 입고 <여행자의 필요>에서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되듯이, 초록색 카디건을 입은 이자벨 위페르는 주제의 현신으로서 영화에 존재하게 된다.

닫힌 시공간을 열어젖히는 몸짓의 수수께끼

이자벨 위페르라는 프랑스 배우의 개입은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번역의 오차까지 포함하는) 텍스트적 역량뿐 아니라 장소성도 극대화한다. <다른나라에서>는 세명의 다른 안느를 보여주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하나의 안느는 또 다른 안느가 도로 틈새에 숨겨둔 우산을 태연히 펼쳐든다. 이어서 안느는 갈림길 앞에서 이전의 안느가 가지 않았던 방향을 택한다. 닫혀 있는 시공간의 논리를 영화로서 열어젖히는 시도 앞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공간을 생생히 바라볼 줄 아는 이방인다운 역할에 충실하다. 그러나 여기서 쓰고 싶은 것은, 이 배우에 관해 좀더 주의 깊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자벨 위페르가 자신의 몸에 부여한 해석력이다. 홍상수 영화의 이자벨 위페르는 비언어적 몸짓의 형태로 빛난다. <다른나라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을 등지고 선 안느는 쨍한 하늘에서 마치 빗방울이 떨어졌다는 듯 손바닥을 하늘에 대어본다. 이 순간, 절도 있게 한쪽 팔을 들어올리는 위페르의 움직임은 하나의 독립된 안무, 또는 피날레의 제스처로 덜컥 다가온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가 세속의 한가운데 있는 평범한 근린공원에서도 마치 고귀한 장소에 있는 듯 단정한 자태로 풍경을 관망하거나 잠들어 있는 모습, “공중을 떠다니는 듯, 가끔은 주저하는 듯” 걷는 자세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위페르의 걸음을 담고 있는 <다른나라에서> <클레어의 카메라> <여행자의 필요>의 마지막 장면은 다양한 가능성의 행로를 담아낸 하나의 지도가 된다.

이자벨 위페르는 때때로 흔쾌할지언정 쉬이 낙관하는 여행자는 아니다. 특유의 표정은 언제나 거리감을 요구한다. 처음 그를 스타 반열에 올린 <레이스를 짜는 여인>(1977)에서부터 위페르는 노르망디 해변에 혼자 남겨진 19살의 여행자였는데, 무료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단단히 불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한 바로 그 표정을 45년 전에도 그대로 짓고 있었다. 이 얼굴에 깃든 절제와 냉정, 흥미를 유발하는 뒤틀림이 클로드 샤브롤, 모리스 피알라, 미하엘 하네케, 폴 버호벤으로부터 심리적 파국과 신체적 파열까지 불러내곤 했다. 점점 미니멀해지는 홍상수 영화는 위페르를 자연의 수수께끼로 내버려둔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공식화한 대로, 우리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매우 분명히, 그녀를 필요로 한다. 훌륭한 수수께끼 앞에서 삶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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