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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같은 그림 찾기, <여행자의 필요>가 보여주는 반복들
이우빈 김예솔비 2024-04-25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두고 ‘반복’이란 의제는 줄곧 다뤄져왔다. 소주병(최근엔 막걸리병)을 늘어놓고 진실이나 사랑처럼 허황한 단어를 외치는 사람들, 지질한 남성들과 그들을 받아치는 여성들의 구도만 보아도 홍상수의 영화는 티가 난다. 늘 어딘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른 말과 행동과 상황들이 거미줄처럼 무수한 연관성을 만든다. 관객들은 이 현장을 목격하며 미묘한 반복들의 관계도를 강박적으로 이어왔다. <여행자의 필요>를 즐기기 위해서도 이 정석적인 방법은 유효해 보인다. 반복을 찾아내려는 독해의 욕심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장면들의 차이를 포착하며 영화 보기의 즐거움을 키우고 있다. 이에 먼저 할 일은 <여행자의 필요> 속 장면과 다른 영화 속 장면들의 유사성부터 찾는 것이겠다. 많은 반복의 흔적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는 일은 관객 각자의 몫이며, 그 결과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절하는 남자들

<해변의 여인>

윤동주의 시비 근처를 산책하던 이리스, 원주, 해순은 함께 서시를 읽고 대화를 나누는데 해순이 갑자기 시비를 향해 절을 한다. 이리스는 원주에게 해순이 절을 할 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고 묻는다. 원주는 해순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너무 불쌍한 거예요.” 절을 하기 위해서는 지면에 몸을 가깝게 몸을 숙이고,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어쩌면 남자는 그러한 낙차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추락에 심취해 있는지도 모른다. <해변의 여인>에서 영화감독 중래(김승우)가 아무것도 없는 해변을 향해 절을 올리면서 오열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 장면에서도 절을 하는 대상보다 절을 하는 자세가 자아내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해 보인다. 예전 홍상수의 영화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남성의 자기 연민으로 극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점차 그러한 남성의 실루엣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세로 영화가 변형되고 있다.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돌 위에 누운 사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행자의 필요>에서 산책하던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다소 지쳤는지 바위 위에 널브러져 눕는다. 아예 돌 위에서 막걸리 몇잔을 걸친 후 잠을 청하기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주인공 구경남(김태우)은 제주도 해변 근처 돌무더기가 널린 땅 위에 벌러덩 눕는다. 이렇게 돌 위에 덩그러니 누운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확정하긴 어렵다. 다만 이들을 찍는 영화의 태도는 나름 솔직하다. 앙각으로 살펴본 이리스의 행동은 느릿느릿 고고해 보이지만, 부감으로 찍어 내린 구경남은 땅 위에 버려진 물고기처럼 배를 까고 헉헉거린다. 카메라가 구경남과 거리를 두고 관조했다면, 이리스는 우러러봤다. 홍상수가 남성과 여성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와 변화를 지시하는 듯하다. /이우빈

뒷모습의 대화

<풀잎들>

보통 홍상수 영화의 대화 장면을 떠올리면 정직한 측면의 투숏, 혹은 여러 사람이 한 테이블에 도란도란 앉아 있는 정면숏이 연상된다. 다만 <여행자의 필요>에선 유독 사람들의 뒷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간의 영화에서도 의미심장한 뒷모습은 있었다. 이를테면 <풀잎들>에서 순영(이유영) 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 재명(김명수)은 끝내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 자리엔 그의 말을 더 믿게 되는 확신, 혹은 그의 존재가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의심이 깃들기도 한다. 이 뒷모습들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사람의 뒷모습이란 표면만으로도 홍상수의 대화 장면엔 늘 불안정한 긴장이 퍼지고 있다. /이우빈

화내는 여자들

<소설가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에서 준희(이혜영)는 후배가 운영하는 서점 앞에 도착한다. 준희가 방문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 서점 안에서 친한 동생에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후배(서영희)의 음성이 들린다. 후배가 화를 내는 이유는 끝내 등장하지 않고 추후에 이렇다 할 사건으로 이어지지도 않지만, 그 음성은 여전히 화면에 이상한 긴장을 부여한다. 이와 비슷하게 <여행자의 필요>에서 아들과 언쟁을 벌이던 중 흥분해서 고함을 치는 여자(조윤희)를 보면서, 불화를 일으키는 쪽이 여성인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자는 화해를 건너뛴 채 다정하게 식탁에 앉아 있다. 버럭 내지르던 남성들의 화가 항상 무언가를 망가뜨리거나 관계를 망치는 에피소드로 이어졌던 반면, 화내는 여성의 불안정한 음성은 극적으로 수렴하기보다 일순간 질서를 흐트러뜨릴 뿐이다. 이것은 보는 이를 순간적으로 동요하게끔 하고 내내 심기를 건드리는 무언가로 남아 결코 실행되지 않을 붕괴의 조짐을 내포한다.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너무 빨리 사라지는 사람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리스는 원주(이혜영)와 해순(권해효)에게 과외 일당을 받은 뒤에 길을 떠난다. 남겨진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카메라가 다시 이리스가 떠난 길목을 비추면 그녀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종종 그 길목에 있어야 하는데 없거나 너무 빠르게 사라진 것들. 그리고 경계를 불확정적으로 만드는 동선이 나타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함부르크와 강릉에 나타난 정체 모를 검은 옷의 남자가 떠오른다. 이리스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변주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이리스의 동선은 ‘하루’라는 연속성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갑작스러운 사라짐과 너무 이른 출현은 시간을 이상한 방식으로 압축시키거나 벌려놓으면서 시공간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가 왜 한국에 왔고, 무엇을 위해 여행을 하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검은 옷을 입은 남자만큼이나 부족하다. 그녀의 사라짐은 영화 속 인물이 걷고 움직이고 말하고 들으면서도 추상이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듯하다. /김예솔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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