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준지(堀 潤之)*
<고다르 혁명> 증보결정판 (<ゴダール革命> 増補決定版, 2023, 하스미 시게히코)
하스미 시게히코는 고다르론을 모은 자신의 책에 <고다르 혁명>이란 제목을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이란 <네 멋대로 해라>(1960)로 영화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하는 그런 혁명이 전혀 아니다. 하스미는 고다르의 추모 글에서도 “고다르처럼 영화를 찍은 영화 작가는 세계에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누벨바그의 기수로서 세계 영화를 일신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단언했다(<아사히 신문>, 2022년 9월15일). 혁명이 아무런 지속적인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초에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다르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고다르가 존재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틈틈이 “고다르를 꼼짝 못하게” 하는 “반(反) 고다르의, 고다르에 대한 혁명”의 의미이다(“고다르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자!”, <영화론 강의>, 2008년). 그것이 고다르와의 안이한 연대나 공투와 대극에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함부로 고다르를 부정하거나 적대시해도 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의) 어떤 몸짓도 고다르를 ‘특권적으로 예외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며 결국 고다르의 (절대적인) 왕위가 유지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2, 제3의 고다르를 등장시키기 위해 영화는 더이상 고다르가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할 용기를 갖겠다는 ‘혁명’의 몸짓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스미는 호소한다. 즉 영화사의 압도적인 ‘예외’로서 무엇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고다르를 어떻게든 옥좌에서 끌어내리지 않으면 영화를 둘러싼 사고의 갱신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스미는 경력 초기에 집필한 서평에서 이미 비평성을 결여한 고다르론에 짜증을 냈다. ‘고다르 혁명’이라는 단어의 등장 이전에 그 봉화를 올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 서평(“두 고다르론-비평의 불모성” , <주간 독서>, 1969년 7월28일호)은 고다르를 논함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충족시켜야 할 전제’는 그의 작품군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덮쳐오는 위협의 연합체로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서평 대상인 장 콜레와 리처드 라우드가 쓴 두권의 고다르론은 ‘고다르라는 병원균’의 위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싸움’이나 ‘고발’을 아예 회피하고, 자료를 적당히 구사해 ‘만인을 향한 사랑의 손길’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그러면 고다르에 대한 ‘안이한 연대의 호소’밖에 안되고 ‘찍는 것을 무효화하는 힘을 감추고 있는 시선’에는 도저히 못 미치니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채로 고다르가 도발적인 자세로 다시 우리 앞을 가로막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서평은 두 고다르론이 ‘제2의 고다르’의 가능성을 낙천적으로 믿고 있기에 오히려 제2, 제3의 고다르를 멀리하게 된다는 것을 씁쓸하게 지적하면서 닫힌다.
조우의 광경
이미 혁명의 강령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좋을 이 서평을 하스미에게 쓰게 한 원동력은 물론 <네 멋대로 해라> 이후 고다르 작품과의 조우일 것이다. 1960년 개봉 당시 <네 멋대로 해라>를 본 하스미에게 이 작품은 얼마나 충격을 주었을까.
아직 수많은 고다르 신화에 가려지지 않은 생생한 고다르와의 만남을, 하스미는 1971년에 솔직하게 되돌아본다. ‘변혁의 예감’이 느껴지면서도 당시 신예인 마르셀 카뮈, 로제 바댕, 루이 말 같은 감독들에게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1950년대 후반의 상황에서 샤브롤, 트뤼포, 고다르의 등장은 틀림없이 사건 이상의 것이었고 특히 <네 멋대로 해라>를 뜻하지 않게 조우했을 때의 흥분은 “한 작가의 탄생에 입회하는 기쁨이라기보다는 한편의 유작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담백하게 영화와 결별해버리는 것 같은 불손한 영혼에의, 선망을 닮은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된다”(“<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치광이 피에로>로”, <영상의 시학>, 2002년)라고 하면서 이 엄청난 영화를 다룬 감독에 대한 (어떻게 보면) 분노와도 비슷한 감정을 토로한다.
“두 시간도 안되는 필름 안에 영화의 유년기와 청춘, 그리고 장년기부터 만년까지를 선점해서 투입하고, 게다가 싱싱하게 보이도록 꾸미는 일까지 해내도록 허용해도 좋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에 이쪽은 이미 잠적한 고다르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 자신을 붙잡을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그 본의 아닌 질주는 이대로 고다르에게 충실한 침묵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어서, 그를 지극히 희소한 요설로 이끌고, 그 세계와의 행복한 공존을 어지럽히고, 밋밋한 시간의 추이를 견디게 하면서 내면으로부터의 붕괴를 겪게 해야 한다는 흉포한 의지가 뒷받침되고 있었다.”(“<네멋대로 해라>에서 <미치광이 피에로>로”, 위와 동일)
찬양과 반발로 찢어진 이율배반적 태도를 고려한다면 그가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한 짧은 코멘트에서 “이후 영화는 이 작품을 뛰어넘는 활극을 찍기에는 이르지 못했다”라고 평가할 때조차 그 배후에는 이 불손한 감독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하기 어려운 ‘흉포한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혁명’에의 의지는 <네 멋대로 해라>를 보는 순간부터 배태돼 반세기 넘게 하스미의 고다르론을 근본적으로 뒷받침해나가게 된다.
고다르와의 대치
이후 하스미는 어떻게 고다르와 대치해나간 것일까.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하스미가 감역·감수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심적으로 관여한 <고다르 전집>(전 4권, 다케우치 서점, 1970~71년)에서의 ‘채록’이다. 하스미는 제3권의 ‘후기’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기 단편에서 <주말>(1967)에 이르는 1960년대의 고다르 작품을 문자로 다시 써내는 이 프로젝트는 과연 “영상 체험의 희박화에 의한 시선의 사보타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쏟아지는 시선에는, 순순히 그 전모를 드러내는 작품이 올바른 이해의 대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낙천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사실 작품을 보는 것이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작품과의 상호 침략 투쟁에 출격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채록이란 그러한 투쟁의 기록이다. 요컨대 이것은 고다르에 대한 비정상적인 사랑에서 오는 무비판적인 몰입도, 독자의 필름 체험을 대신하는 ‘공상의 영화관’도 되어서는 안된다. 굳이 말한다면 고다르를 허물어 무너뜨리기 위한 기획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채록의 독자들에게도 또 “작은 틈을 타서, 모든 방면에서 고다르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하고, 적진 깊숙이 잠입해, 그 전신을 마비시키도록” 하는 일이 요구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채록은, 그 자체가 ‘상호 침략의 투쟁’의 장소인 동시에, 그 독자에게 ‘고다르 혁명’을 위한 장비 일체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다르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해 고다르를 ‘무너뜨리는’ 것. 하스미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단 그가 자유자재로 잘 구사하며 오즈 야스지로와 존 포드에 있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던 주제론적 비평(테마틱스)이 그다지 유효하게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하스미가 고다르 작품을 대상으로 주제론적 비평을 시도한, 몇 안되는 사례 중 하나인 “하얀 벽의 고다르로부터 램프셰이드의 고다르에게”라는 2005년 강연(<영화론 강의>)에서는 어느 시기부터 고다르의 ‘램프셰이드’라는 주제의 편재를 지적함으로써 고다르를 기습적으로 공격했다고 해도, 그러한 “발밑을 흔들어서 넘어뜨리려는 몸짓이 정작 고다르에 대한 작품의 열렬한 옹호로도 통하게 된다”라는 ‘위험한 모순’에 주의가 촉구되고 있다. 말하자면 ‘사랑의 기법’으로서의 주제론적 비평은 혁명을 위한 무기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혁명의 성취
그렇다면 주제론적 비평을 봉인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고다르를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하스미의 전략은 고다르라고 하는 ‘예외’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철저히 해명하는 지극히 정공법적인 방식이다. 1988년의 “파국적 슬로모션”(<고다르 혁명> 수록)은 고다르가 개성이나 독창성과는 무관한 천재임을 인정하고 그가 찍는 영화가 우리가 찍는 영화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압도적 예외성을 자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뒤 고다르의 작품군을 동어반복적인 단언 명제와 그 조합이라는 논리로 생생하게 읽어나간다. 예를 들어 <카르멘이라는 이름의 여자>(1983)에서는 영화 작가는 영화를 찍는다, 도둑은 도둑질한다, 실업자는 실직한다, 유혹은 유혹적이다, 파국은 파국적이다 등등의 명제가 ‘왜’와 ‘왜냐하면’을 배제한 중간적인 시공간에서 오로지 상호간섭한다. “그때마다 ‘결정적인 조합’이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2002년의 “고다르의 고독”(<고다르 혁명> 수록)은 늦는(지각하는) 것, 기다릴 수 없는 것, 주지 않는 것이라는 세 가지 명제를 축으로 고다르를, 특히 <영화의 역사(들)>(1989~1999)를 근본적으로 통어하고 있는 발상을 적출한다. 게다가 고다르 개인의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성벽은 대부분 그대로 그가 구상하는 영화의 특질과 겹친다. 그런 관점에서 전 8장, 4시간 반에 이르는 이 비디오 대작의 급소를 극히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영화사의 얽힘을 드러내는 이 글은 세계에 수많은 <영화의 역사(들)> 비평 중에서도 가장 스릴 있는 글 중 하나다(“파국적 슬로모션”과 “고다르의 고독”은 <영화의 맨살>에 수록.-편집자).
이토록 완벽하게 작품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파헤치고, 제작자의 목구멍에 번쩍 빛나는 비수를 들이대는 듯한 기백 어린 두편의 비평은 하스미가 과거 콜레나 라우드의 고다르론에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 “찍는 것을 무효로 하는 힘을 지닌 시선”을 충분할 정도로 갖추고 있다. 혹은 “그 작품이 빚어내는 거대한 신화 체계 자체의 허구성을 고발한다”는 혁명 강령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고다르론이 빠지기 쉬운 안이한 칭찬과 성급한 부정이라는 함정을 주도면밀하게 회피하면서 험로를 뚫고 고다르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여기서 정점에 이르고 있다.
‘고다르 혁명’의 주역이 되려면 하스미처럼 고다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러면서 체제 전복의 강인한 의지를 계속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의 첨병이 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정예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혁명은 대중 봉기보다는 비밀 결사에 의한 암살 계획과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청껏 혁명을 선동하는 듯 보이는 이 책 <고다르 혁명>은 사실 언제 작렬할지 모르는 불온한 시한폭탄으로서 고독한 소수자들의 아득한 연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책인지도 모른다.**
*호리 준지 도쿄대학교 교양학부를 졸업했으며 파리 3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 간사이대학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공은 영화 연구 및 표상문화론이다.
**이 글은 호리 준지가 <고다르 혁명> 증보결정판(2023,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에 실은 해설을 <씨네21> 게재용으로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