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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떠난 영국의 원로 배우, 이안 홈(1931~2020)의 스크린 속 모습들

이안 홈

<반지의 제왕>·<호빗> 시리즈(이하 <반지의 제왕> 시리즈) 속 노년의 빌보 베긴스 역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 이안 홈이 지난 6월19일 별세했다. 같은 날 이안 홈의 에이전트는 "배우 이안 홈이 오늘 아침 세상을 떠났다. 지병이었던 파킨슨병이 원인이었으며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영국 왕실 드라마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배운 이안 홈은 1950년대부터 100편이 넘는 연극, 영화, 드라마 등으로 활약하며 자리를 지켜왔다. 1998년에는 예술 분야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직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여러 영화계 인사들은 조의를 표했다. <반지의 제왕>·<호빗> 시리즈를 연출한 피터 잭슨 감독은 SNS를 통해 “이안은 정말 유쾌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는 조용하지만 장난스러운, 그리고 사랑스러운 반짝임이 있었다”며 그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빌보의 조카 프로도를 연기한 일라이저 우드는 “유일하고, 기발하며, 활기찼던 이안의 죽음이 너무 가슴 아프다. 잘 가요 삼촌”이라 전했으며, <에이리언>으로 이안 홈과 호흡을 맞췄던 배우 톰 스케릿은 “노스트로모호(<에이리언>의 배경이었던 우주선) 선원들 모두가 경의를 표한다. 편히 쉬시기를”이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수십 년 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안 홈.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팬들은 그를 작품으로 기억할 것이다. 수십 편의 출연작 중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다섯 편의 영화들을 꼽아,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을 돌아봤다.

<에이리언>(1979) ㅣ 애쉬

<에이리언>

1931년생인 이안 홈은 20대 시절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했지만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살에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49살 무렵, 기념비적인 SF 영화에 출연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파격적인 비주얼로 SF 영화의 판도를 바꾼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이다. 그 속에서 이안 홈은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안드로이드 애쉬를 맡으며 소름 끼치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우주비행선의 과학장교로 처음 등장하지만, 점차 검은 속내를 드러내며 안드로이드임이 밝혀지는 애쉬. 영화 전반에 짙게 깔리는 긴장감은 미지의 생명체인 에일리언이 뿜어대는 불확실성에서도 기인했지만, 인간의 외형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행동을 일삼는 애쉬의 몫도 적지 않았다. 이안 홈은 인지한 미소 뒤에 감춘 이면으로 관객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불의 전차>(1981) ㅣ 샘 무사비니

<불의 전차>

1982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휩쓴 <불의 전차>도 이안 홈 하면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두 육상 선수, 에릭 리델과 해럴드 에이브라함의 실화를 담았다. 이안 홈은 그중 유태인으로서 사회적 박탈감을 느끼는 해럴드(벤 크로스)를 훈련시키는 샘 무사비니 코치를 연기했다. 아랍계 혈통으로서 해럴드와 함께 인종차별을 받지만 샘은 제자에게 ‘결국 넘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지금은 마치 스포츠 영화의 클리셰처럼 굳어진 ‘무뚝뚝하지만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전형 같은 캐릭터였지만, 이안 홈은 퉁명스러운 표정 뒤에 감춰진 따듯함으로 큰 울림을 전했다. 그 결과 이안 홈은 제34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탄탄히 쌓아온 연기력을 다시금 입증했다.

<제5원소>(1997) ㅣ 코넬리우스

<제5원소>

<에이리언> 이후로도 이안 홈은 테리 길리엄 감독의 <브라질>,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네이키드 런치> 등 걸출한 SF 영화들로 관객들을 만났다. 이와 더불어 이안 홈의 인지도를 더욱 높여준 작품이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다. 그는 주인공 코벤(브루스 윌리스)과 리루(밀라 요보비치)를 돕는 조력자, 코넬리우스 신부를 연기하며 극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지구의 붕괴를 막기 위해 올바른 조언을 고하지만 무시당하고, 마지막 희망인 코벤 일행과 동행하는 인물이다. 이안 홈은 코르넬리우스를 경건하지만 냉소적이게 그려냈으며, 경쾌한 영화의 분위기에 맞추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코미디 요소까지 살렸다. 평면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달콤한 내세>(1997) ㅣ 미첼

<달콤한 내세>

1997년은 이안 홈에게 특별한 해였을 듯하다. <제5원소>가 전세계적인 흥행을 기록, 같은 해 공개된 아톰 에고이얀 감독의 <달콤한 내세>가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달콤한 내세>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아이들을 떠나보낸 작은 마을의 슬픔을 조명한다. 이안 홈이 맡은 미첼은 이런 마을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 사이로 돌을 던지는 변호사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피해자 가족들에게 소송을 부추기는 속물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미첼 역시 마약에 중독된 채 수년째 집을 나간 딸을 둔 아버지다. 영화는 자식을 잃어가는 슬픔에 몸부림치면서도, 그 슬픔을 고스란히 이용하려는 미첼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었다. 이안 홈은 이 이중적인 캐릭터를 단순히 악인으로 풀어내지 않고, 그 고뇌와 괴리를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반지의 제왕>·<호빗> 시리즈(2001~2014) ㅣ 빌보 배긴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이안 홈은 <프롬 헬>, <에비에이터>, <라따뚜이> 등 다양한 작품들로 꾸준히 활약했다. 그러나 그의 2000년대 대표작은 역시 <반지의 제왕> 시리즈다. 작품의 지명도도 큰 이유일 수 있지만, 짧은 출연만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이안 홈의 호연도 간과할 수 없다. 소박한 삶 속에서도 절대반지를 마주한 그의 눈빛 속에는 들끓는 욕망이 드러나며, 다시 한번 모험을 기대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안 홈은 찰나에 순간에 빌보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오롯이 담아내며 장면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피터 젝슨 감독은 이런 이안 홈에 대해 “그에게는 디렉팅이 따로 필요 없었다. 그는 숙련되게 같은 장면을 다른 톤으로 여러 번 반복하며, 오히려 나에게 넓은 선택의 폭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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