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개봉한 <크리드2>. 국내에는 정식 개봉하지 않았던 <크리드>(2015)의 속편이자, 그 유명한 <록키> 시리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다. 은퇴한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가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아폴로 크리드(칼 웨더스)의 아들 아도니스 크리드(마이클 B. 조던)를 복서로 키워내는 이야기다. 1편이 그 시작을 알렸다면, 이번 <크리드2>는 아도니스가 그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이반 드라고(돌프 룬드그렌)의 아들 빅터 드라고(플로리안 문테아누)와 맞붙는 과정을 그렸다.
그런데, 1편이 국내 개봉하지 않았음에도 아도니스 크리드 역을 연기한 마이클 B. 조던은 낯선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 그는 2018년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기록했던 <블랙 팬서>의 악역 킬몽거를 연기한 배우다. 전작에서도 묵직한 카리스마로 관객들의 마음에 강력한 ‘훅’을 꽂아 넣었던 그. <크리드2> 개봉과 함께 킬몽거가 전부가 아닌 배우, 마이클 B. 조던에 대해 알아봤다.
아역 배우 출신
사실 그는 13살 부터 아역으로 활동한 21년 차 배우다. 데뷔작은 많은 이들의 인생 드라마로 꼽히는 HBO의 <소프라노스> 시즌 1(1999). 다만 단역으로 잠깐 출연, 조연으로 첫 등장한 작품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야구 소재 영화 <하드볼>(2001)이다. 별다른 목표 없이 인생을 보내던 백수 코너(키아누 리브스)가 가난한 아이들로 이루어진 야구단을 이끈다는 내용. 마이클 B. 조던은 야구단의 일원인 자말을 연기했다.
그는 이후 출연한 HBO 드라마 <더 와이어> 시즌 1(2002)에서도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을 챙기며, 생계를 위해 마약까지 판매하는 소년 왈레스를 연기했다. 자신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이지만 책임감과 의리로 많은 것을 짊어지는 인물. 빈민가의 현실을 덤덤하게 풀어낸 작품 속, 마이클 B. 조던의 연기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던 역할이다.
<하드볼>, <더 와이어> 외에도 그는 여러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CSI 라스베가스>, <본즈> 등 수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했다. 미국 수사물 팬이라면 스쳐가는 그의 모습들을 종종 봤을 수도 있다.
<크로니클>
마이클 B. 조던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린 것은 그의 첫 영화 주연작인 <크로니클>에서다. 아역으로 연기력을 다진 그는 이번에는 10대를 연기했다. 그가 맡은 스티브 역은 친구 앤드류(데인 드한), 멧(알렉스 러셀)과 함께 우연히 초능력을 얻게 되는 고등학생이다. 모난 구석은 없지만 인기를 위해 초능력을 사용하는 다소 철없는 인물.
스티브는 두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비중으로 출연했지만, 앤드류의 피해 의식과 죄책감을 가중시키며 스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크로니클>은 폭발적인 연기를 보여준 데인 드한이 돋보였던 영화였지만, 마이클 B. 조던의 스티브도 숨은 공신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성장물과 히어로물을 섞은 구성과 파운드 푸티지를 활용한 독특한 촬영기법 등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던 <크로니클>인 만큼, 마이클 B. 조던 역시 이를 계기로 보다 많은 관객들,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페르소나
마이클 B. 조던을 논할 때 라이언 쿠글러 감독을 빼놓을 순 없다. 앞서 언급한 <크리드>, <블랙 팬서>도 모두 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다. 두 사람의 시작점은 2013년 제작된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2009년, 오스카 그랜트라는 흑인 남성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백인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부당한 인종차별의 상징처럼 남은 사건 속, 오스카 그랜트를 재현할 이로 마이클 B. 조던을 낙점했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도 시원치 않을망정,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매우 관조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비췄다. 그는 사건을 극적으로 그리는 대신 오히려 사건 밖의 오스카 그랜트를 세밀히 관찰했다. 오스카 그랜트가 과거를 청산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모습,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 등 그의 일상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자연스레 마이클 B. 조던도 과장되지 않은 절제된 연기로 영화의 톤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런 평범했던 일상이 갑작스레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는 오히려 더 큰 경각심과 울림을 전달했다. 그 결과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칸영화제, 선댄스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를 휩쓸었다.
이후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첫 상업영화에 도전한 영화가 <크리드>다. 제작 발표 당시, <크리드>는 잘 마무리된 <록키> 시리즈를 다시 불러오는 것으로 많은 팬들의 우려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영화는 관객, 평단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다. 아도니스 크리드라는 새로운 인물의 활용, 실베스터 스탤론의 쇠퇴한 록키 연기, 원년 시리즈를 추억할 수 있는 오마주 등으로 <록키> 시리즈의 명성을 잘 이어갔다는 평.
이를 눈여겨 본 마블 스튜디오가 라이언 쿠글러 감독, 마이클 B. 조던을 데려와 제작한 것이 <블랙 팬서>. 알다시피 <블랙 팬서>는 대성공을 거두며, 라이언 쿠글러 감독에게 최연소 10억 달러 돌파 영화감독, 최고 수익을 올린 흑인 감독 두 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안겨줬다. 마이클 B. 조던 역시 “<토르> 시리즈의 로키(톰 히들스턴)와 함께 MCU를 대표하는 매력적인 악역”이라는 말을 들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독립영화부터 저예산 상업영화,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 영화까지,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마이클 B. 조던은 나란히 ‘꽃길’을 걸었다.
환상의 콤비로 자리 잡은 만큼, 마이클 B. 조던은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차기작 <롱 앤서>(Wrong Answer)에도 이미 출연을 확정 지은 상태다. 학생들의 성적을 조작해 학교의 기금을 마련하려는 수학 교사의 이야기로, 마이클 B. 조던은 주인공 루이스 선생님을 연기한다.
흑역사
너무 탄탄대로 아니냐고? 마이클 B. 조던에게도 흑역사는 존재한다. 2005년 이미 한차례 영화화된 적 있는 마블 코믹스 원작의 <판타스틱 4>다. 우주 에너지에 노출돼 독특한 능력을 가지게 된 네 명의 슈퍼히어로들을 내세운 영화. 그중 마이클 B. 조던은 2005년판에서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했던 불꽃을 다루는 히어로 조니 스톰을 연기했다.
<판타스틱 4>는 그의 첫 슈퍼히어로 영화였지만 부족한 개연성, 산만한 편집, 조악한 CG 등으로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최악의 영화를 선정하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무려 다섯 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 세 부문에 선정되는 굴욕을 겪었다. 마이클 B. 조던은 나머지 세 주연배우와 함께 ‘최악의 커플상’ 후보에 올랐다. 유명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는 신선도 20%(현재 9%)를 기록했으며 국내외 여러 매체들에서도 악평이 쏟아졌다.
놀라운 것은 <판타스틱 4>의 감독이 <크로니클>을 연출한 조쉬 트랭크 감독이라는 것. 그는 <판타스틱 4>를 밝은 분위기의 원작 코믹스, 2005년작에 비해 <크로니클>처럼 어둡고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연출하려 했다. 그러나 그 중도점을 맞추지 못한 채 실패했다. 그는 <판타스틱 4>의 제작 전 이미 <스타워즈> 시리즈의 속편 연출로 내정됐지만 <판타스틱 4>를 계기로 하차하기도 했다. 다만 조쉬 트랭크 감독과 달리 마이클 B. 조던은 같은 해 개봉한 <크리드>로 곧바로 설욕에 성공했다.
농구를 사랑하는 마이클 ‘B’ 조던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할 때면, 미들네임 ‘B’를 치기도 전에 뜨는 이름이 있다.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다. 그런데, 마이클 B. 조던은 실제로도 마이클 조던처럼 농구를 매우 좋아한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홈스쿨링을 받았지만 뉴저지의 뉴어크 고등학교 농구 팀에서 활동했다. 그만큼 뛰어난 농구 실력과 열정을 자랑했다.
그는 배우로 자리 잡은 후에도 연예인 농구단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NBA에서 개최되는 연예인 농구 대회에도 빈번히 출전했다. 덕분에 르브론 제임스, 조던 클락슨, 샤킬 오닐 등 유명 농구 선수들과도 친분이 있다. 2016년에는 농구 시뮬레이션 게임 ‘NBA 2K16’에서 ‘저스티스 영’이라는 신인 선수의 목소리를 연기하기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농구 외에도 마이클 B. 조던이 많은 애정을 쏟아붓는 또 하나의 취미가 있다. 북미권에서는 ‘아니메(Anime)’라고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그는 개인 트위터를 통해 <드래곤 볼>, <나루토>, <블리치> 등 유명 일본 애니메이션을 자주 언급한다. 그중 가장 많이 등장한 작품은 닌자들의 이야기를 <나루토>. 그는 인터뷰를 통해 “<나루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12살 때부터 꾸준히 좋아해왔다”고 전하기도 했다. 또한 <크리드> 시리즈의 주역답게 권투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더 파이팅>도 좋아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마이클 B. 조던의 애니메이션을 향한 사랑은 차기작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2019년 방영 예정인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젠: 락>에서 직접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 주인공 줄리언의 목소리도 연기했다. 2068년 미래, 독재 정권에 맞서는 로봇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마이클 B. 조던과 함께 다코타 패닝, 메이지 윌리엄스 등의 유명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젠: 락>(Gen: Lock)
가족애
2018년 제작된 TV 영화 <화씨 451>에서 주인공 몬태그를 연기한 마이클 B. 조던.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1996년 제작된 바 있는 영화를 다시 리메이크한 작품. 호평을 받았던 1996년판과 달리, 마이클 B. 조던이 출연한 <화씨 451>은 “원작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마이클 B. 조던은 <화씨 451>의 캐스팅을 제의를 거절했었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어머니를 생각해서’다. <크로니클>의 스티브,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의 오스카, <블랙 팬서>의 킬몽거 등 유독 작품 속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자주 맞이했던 마이클 B. 조던. 그의 어머니는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매번 극 중에서 죽는 연기만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 배역이 죽지 않는 <화씨 451>을 다시 받아들였다. 그는 “어머니가 영화 속에서 내가 끝까지 살아 결국 이기는 것을 한 번은 보셨으면 했다”고 전했다.
마이클 B. 조던은 최근 <크리드 2> 관련 인터뷰에서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요즘 ‘유산’이라는 단어가 자꾸 가슴에 맴돈다. 나의 성공을 가족에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부모님, 남동생, 누나, 조카들, 그리고 미래의 아이들에게까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 가족 모두를 책임질 수 있는 재산과 명예를 얻고 싶다. 아직 뭘 쓸지는 생각 안 했지만, 유언장을 쓸 때 굉장히 행복할 것 같다”고 전했다.
차기작
마지막은 마이클 B. 조던의 차기작들이다. 앞서 말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롱 앤서>, 애니메이션 <젠: 락> 외에도 그 앞에는 바쁜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다. 억울한 사형수를 석방하기 위한 인권 변호사의 고군분투를 다룬 <저스트 머시>(Just Mercy)가 현재 후반 작업 중이며, 마약 조직에게 여자친구를 잃은 전직 CIA 요원의 복수를 그린 <윗아웃 리모스>(Without Remorse)가 2020년 개봉을 목표로 프리 프로덕션에 돌입했다. 2018년 9월에는 톰 클랜시의 동명 소설이자 밀리터리 FPS 게임으로도 잘 알려진 <레인보우 식스> 영화화에 주연으로 발탁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영화의 자세한 줄거리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헨리 카빌 이후의 슈퍼맨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슈퍼맨을 연기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잘 알려진 클라크 켄트 역을 맡고 싶지는 않다. 원작의 다중우주에서도 등장했던 흑인 슈퍼맨을 연기하고 싶다”고 전했다. 해외에서는 DC 코믹스에서 등장했던 흑인 슈퍼맨, 발 조드와 마이클 B. 조던을 합친 팬아트도 등장했다. 클라크 켄트의 슈퍼맨과 달리 망토와 가슴의 마크가 은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