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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공짜 극장표 2장, <아름다운 시절>
2001-03-22

1998년 어느날 시내 한 극장에서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영화를 봤다. 내용 중 시골 천막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단발 머리를 한 여자 아이가 칠판에 적힌 산수 문제를 못 풀어 꿇어 앉아 벌받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자 누군가 그 여자아이가 지저분한 거 하며, 띨빵한 거, 또 얼굴 작은 것 등이 영락없이 나와 꼭 같다고 놀렸다. 그 얘기를 떠올리면 어느 덧 기억은 철암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속초에서 전학가 중학교 3학년 봉화로 옮겨가기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에 늘 아련한 그리움이 있는 곳이다.

원주, 제천, 태백시를 지나 한참을 들어가면 철암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지금은 석탄산업이 사향길이라 마을 전체가 썰렁하기 그지 없지만 예전에는 ‘지나가던 개도 1만원권을 물고 간다’는 말이 나올 만큼 번성하던 곳이었다. 내가 전학을 간 해도 한창이었던 때라 그 작은 마을에 극장이 있었다. 그 때 우리집에는 어찌어찌하여 영화가 바뀔 때마다 분홍색 공짜 극장표가 2장씩 집으로 배달됐는데, 그 덕분에 동네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내게 잘만 보이면 공짜 입장권을 손에 쥐어줬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어린 시절을 극장을 들락거리며 보냈고 이소룡이 나오는 중국 무술영화나 윤정희, 신성일, 이대엽, 최무룡 등이 나오는, 당시엔 도무지 이해가 안가던 성인 영화들도 보았다. 영화를 본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방과 후 청소할 때나 산을 넘으며 하교할 때 친구들에게 전날 본 영화를 손짓 발짓해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 얘기해 줬다.

특별한 사정(연소자 관람 '세게' 불가)이 없는 한 새 프로가 걸리면 단짝 친구와 행사처럼 극장에 가곤 했던 소위 문화 활동이, 남녀 공학인 중학교에 입학하고 살벌하게 단속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놀이가 되지 못했다. 70∼80년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랬듯이 나 또한 부모님 눈치를 봐가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명화 극장>이니 <주말의 명화>를 끈덕지게 낙으로 삼고 보았다. <빠삐용>에서 더스틴 호프먼이 감옥을 탈출해 파도를 타고 아득히 멀어져 갈 때면 나 또한 막 자유를 얻은 듯 환호했고, <황야의 7인> 같은 서부영화를 볼 때면 주인공들의 유연한 총놀림과 그들의 패기와 정열에 감탄했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 존 웨인, 폴 뉴먼, 제임스 코번 같은 배우들이 늘씬하게 빠진 말 잔등에 올라 휘파람 소리 섞인 음악을 배경으로 유유히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을 볼 때면 나도 한번쯤 저렇게 돼 봤으면 하는 엉뚱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80년대의 대학 시절, 그 시절에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던지 고교 때보다 오히려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때 친구들은 3패로 나뉘어 있었는데, 1패는 취업준비에 여념 없는 무리들이었고, 2패는 독재정치에 반대하느라 항상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교정 외곽에서 맴도는 친구들, 3패는 나처럼 그저 가방 메고 강의실과 도서관 그리고 학생식당을 오가며 쓸데없는 고민만 하던 시계추 무리들이었다. 그 당시는 사는 것 자체가 불안했으며, 진로에 대한 걱정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영화를 보는 일도 뜸해지고 고교 때 친구와 경쟁적으로 외웠던 친숙한 배우이름도 하나 둘 기억에서 흐릿해져 갔다. 극장에서 본 영화라곤 고작 <안녕하세요, 하나님>이나 <킬링필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사에 적을 둔 1997년 어느 여름날, 난 벤츠를 타고 홍콩 아일랜드를 돌고 있었다. 내 맞은 편에는 <여인의 향기>의 크리스 오도넬이 <배트맨과 로빈>의 홍보를 위한 인터뷰를 마치고 약혼녀와 더불어 구경에 나섰다. 그것도 나의 보호아래…. <여인의 향기>는 알 파치노가 낯선 여자와 췄던 멋진 탱고 춤도 기억에 남지만, 앳된 오도넬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퇴역 장교의 자살을 막으려고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한 영화기도 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영화의 주인공과 같은 차를 타고 홍콩 아일랜드를 돌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영화 속 주인공을 현실의 한 시점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깜짝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흥분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영화는단 한편으로 한정하기엔 너무도 많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나 <화성침공>은 재기발랄하고 상상력이 있어서 좋고 <데블스 에드버킷>이나 <애니 기븐 선데이>에서는 좋아하는 배우 알 파치노가 나와서 좋고 하는 식이다. 그래서 난 어떤 영화를 보아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숙연해진다. 영화야 어떻든 만든 이들의 수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 또한 삶의 마지막 호흡을 들이키는 순간이 오면 살아오면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을 엔딩 크레딧에 올리며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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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윤숙/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마케팅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