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전후 혼란과 산업화의 이행기에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선 임권택은 오랜 시간 동안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임권택의 족적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이하고 적응하면서 직업감독과 작가로서 탐색의 길을 모색해왔다고 할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이력에서의 변곡점을 거친 뒤 임권택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와 문화사, 본질적으로는 그 자신의 역사(개인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내외로부터 ‘한국적 영화 미학’으로 곧잘 정의되는 임권택의 영화는 그 변모의 양상이 시기별로 뚜렷하며, 개방적이다. 한 우주의 완성에 이르는 구도적 여정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임권택의 세계는 끊임없이 동요하며 하나의 국면에서 다음으로 이행해가는 탐조자의 삶을 그린다. 밥벌이를 위한 고용감독으로 출발하여 한국영화의 정체성과 동일시되는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 역사는 한국영화사의 흐름과도 조응한다. 임권택의 영화 세계는 10년을 주기로 하여 끊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10년 마다 영화에 대한 시각과 접근이 바뀌었다.
1960년대, 생계형 감독으로 장르 연출가의 면모를 보이다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풍비박산이 난 집을 떠나 유랑하던 청년 임권택은 우연한 기회에 영화판에 발을 디딘 후 정창화 감독의 문하에서 도제시기를 거쳤다. 1960년대의 임권택은 어떤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비전도, 예술적인 야망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이래 10년 남짓 동안 대략 50여 편을 연출하면서 생계형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된다. 이번 임권택 회고전에 포함된 <삼국대협>(1971)은 이 시절 장르 연출가로서 임권택의 면모가 드러난 영화다. 액션을 본위로 한 흔한 복수드라마지만, 데뷔 후 근 10년 간 연출의 정석을 착실하게 익혀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극과 코미디, 액션, 스릴러 등 당대에 유행했던 대중 장르를 두루 섭렵했던 이 영화들에 대해 임권택은 현실이나 삶과는 무관한 ‘거짓말’이라고 자책한다.
1970년대, 한국식 영화 문법을 만들다 1970년대 초반 “이런 식으로는 감독으로서 장래가 있을 수 없다, 한국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성에 도달한다. 1970년대는 유신의 망령과 맞물려 한국영화사 최악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 임권택은 한국영화 의무제작 제도에 편승하여, 새마을영화, 반공영화, 문예영화를 만들며 쉼 없이 활동을 계속했다. 1970년대 국책, 계몽영화들은 1960년대 뼛속 깊이 체질화된 미국영화의 잔재를 떨쳐버리기 위한 수련과 실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 정서와는 동떨어진, 미국영화 흉내내기에 급급했다는 자괴 끝에 내린 결론은 영화 형식의 변화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 임권택의 영화는 미국영화의 속도감에 기초해 있었다. 미국식 장르와 드라마 구조, 정서의 흐름, 문법에 따라 미국적 리듬과 속도가 만들어졌다면,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적 삶의 속도와 리듬을 찾으려 했다. 인위적으로 극성을 만들어내는 미국식 영화 문법에서 탈피하여 삶을 진솔하게 찍겠다는 몸부림 끝에 나온 영화가 <족보>(1978)였다. 그러나 “임권택 영화의 새로운 출발”로 자평하는 <족보>는 평단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고 흥행에서도 쓴 맛을 봤다.
1980년대, ‘인본’의 테마에 천착하다 상업감독에서 영화작가로의 이행기인 1980년대는 비약적인 변모의 시기였다. 1980년대 그는 ‘인본’의 테마에 일관되게 천착했다. <깃발 없는 기수>(1979) <짝코>(1980) <길소뜸>(1985) 등 이데올로기와 전쟁이 낳은 비극에 대한 회의를 담은 작품을 통해, <안개마을>(1982), <티켓>(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로 이어지는, 인간세계의 고통과 시련을 특유의 대승적 휴머니즘으로 극복하려는 작품을 통해 새로운 영화관을 정립해나간다. 토벌대와 빨치산으로 만난 두 남자의 은원(恩怨)과 화해를 테마로 한 <짝코>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고 불행과 비극, 희생의 발판으로 삼는 현실을 묘사했다. 인본의 정신으로 반목과 대립, 갈등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동학의 창시자 최시형을 제재로 삼은 <개벽>(1991)까지 이어졌다. 이문열의 단편 ‘익명의 섬’을 원작으로 한 <안개마을>은 성적으로 억압된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미시적으로 관찰한 문제작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적 영화 미학의 상징이 되다 1990년대 임권택은 감독으로서 위상에 큰 변화를 겪는다. 초기 액션영화의 기억을 살린 <장군의 아들>(1990), 오래 전부터 구상했던 첫 번째 판소리 영화 <서편제>(1993)가 연달아 흥행하면서 감독으로서 입지가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두편의 영화는 ‘국민감독’과 한국적 영화 미학의 상징이라는 칭호를 그에게 주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임권택의 영화는 미학적 탐사로 기운다. ‘우리 것’에 대한 추구가 계속되면서 점차 영화 형식을 가다듬어갔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영화는 <춘향뎐>(2000)이다. 판소리 미학의 정수라 할 만한 <춘향뎐>은 한편의 전위적인 실험극이다. 이 영화는 ‘판소리’라는 한국의 전통 연행 양식이 서양적 시각체계에 근간을 둔 영화로 어떻게 번안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과 같다. 독창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판소리에 내재한 고유한 양식성, 이를테면 이야기의 단위의 분절과 리듬, 말과 (상상적)이미지의 관계,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심화되어가는 연행자와 청중의 밀착성을 영화적 형식으로 옮겨 내고 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간 영화처럼 펼쳐진 장인의 삶 한국의 전통적 소재를 서사화하여 유니크한 미학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임권택의 생애와 이력은 지속적으로 이동해왔다. 고용감독의 시기부터, 국책/계몽영화의 제작, 영화작가로서 예술적 자의식이 발아하면서 영화언어가 공고해지는 시기, 국민감독과 국제적인 명망가로 진화하는 궤적은 쉬지 않고 스스로를 연마해가는 장인적 숙성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세계에 몰두한 장인의 스토리(역사)를 제재로 삼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들은 한 인물의 역사를 통한 자의식적 성찰의 행장기로 볼 수 있다. 임권택의 영화 속 인물들은 늘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임권택은 자신의 인물들이 통과하는 몇 가지 단계를 설정해두고, 그 단계에 따라 이야기를 얼기설기 엮고, 각 단계마다 흘러가는 인생과 그 안에서 숙성되는 장인적 세계를 담아낸다. 이는 곧 완성에 도달할 수 없지만 완성을 향해 나아갔던 그 자신의 예술적 편력의 서사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