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와 내가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원체험을 제공한 영화는, 바로 1997년 2회 영화제 때 본 차이밍량의 <하류>다. ‘아시아 영화’라는 개념과의 접촉 혹은 한국 이외 국가와의 ‘동시대성’이랄까,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그 평범한 청년 리캉생의 ‘통증’이 여태껏 본 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연히 강물에 떠내려가는 시체 역으로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샤오강(리캉생)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목의 통증에 시달린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찾은 게이 사우나에서 나이 든 아버지(미아오 티엔)를 만나게 된다. 증기로 뿌옇고 음침한 사우나 안에서 서로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 관계를 맺는다는 충격적인 얘기다. 그리고 그해 영화제에서 거의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미아오 티엔의 또 다른 영화, 바로 그 전설의 무협영화인 호금전의 <협녀>(1971)를 봤다. 호금전의 영화에서 객잔을 습격하던 사나운 표정의 그가 차이밍량의 영화에서는 쓸쓸한 표정으로 맥도널드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리캉생의 아버지’로 기억된 그는 <하류>에 이어 차이밍량의 <구멍>(1998)과 <거기 지금 몇 시인가?>(2001)에도 출연했고, 리캉생의 데뷔작 <불견>(2003)에서도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로 나왔다. 차이밍량이 언제나 ‘파파 미아오’라 부를 정도로 존경을 바쳤던 그는 부산에서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은 배우였다. 하지만 그는 향년 80세의 나이로 역시 차이밍량의 <안녕,용문객잔>(2003)을 유작으로 남기고 세상을 떴다. 영영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류>와 <협녀> 사이에서, 2회 영화제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