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바통을 이어받은 <이클립스>의 감독 데이비드 슬레이드는 여러모로 적절한 선택이다. 엘렌 페이지 주연의 <하드 캔디>와 뱀파이어 호러영화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를 감독한 그는 자신의 지장을 분명하게 시리즈에 이식한다.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의 인상적인 설원의 뱀파이어 공격 시퀀스를 지휘했던 솜씨는 <이클립스>의 액션장면들에서도 흔적이 꽤 남아 있다. 특히 이 남성적인 장르영화 감독은 벨라를 사이에 둔 에드워드와 제이콥의 심각한(지나치게 심각한 나머지 종종 느끼한) 적대관계에 자조적인 유머를 삽입할 줄도 안다. 이를테면, 시도 때도 없이 웃통을 벗고 나타나는 제이콥에게 인상을 구기며 “저놈은 티셔츠도 없냐”고 읊조리는 에드워드의 대사 같은 것 말이다.
<트와일라잇>과 <뉴문>이 신분 차이를 극복하는 10대 로맨스라면 <이클립스>는 ‘첫경험’의 아찔한 순간에 대한 좀더 성적인 함의를 보여준다. 벨라는 끊임없이 에드워드와 첫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에드워드는 이를 거부한다. 인간인 벨라의 몸에 불가해한 위협을 주지 않겠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19세기 출신인 그에게 첫경험은 결혼식 이후에나 연인에게 선물하는 로맨스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벨라는 말한다. “그건 구식도 아니고 고대(Ancient)적 생각이야.” 이게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를 21세기에 끌어들이려는 보수적 발언이라고 화를 낼 법한 관객도 막상 에드워드의 샛노란 눈동자가 스크린에 클로즈업되는 순간에는 내 주위에는 왜 저런 놈 없냐며 낮은 신음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구식 할리퀸이 안겨주는 시대를 초월한 마력이랄까.
시리즈의 최종장이 될 차기작 <브레이킹 던>의 감독은 <신과 몬스터>(1998), <킨제이 보고서>(2004)의 빌 콘돈이다. 랄프 로렌 모델과 돌체 앤 가바나 모델 사이에서 고민하는 몽정기 계집애들의 섹스판타지라고 웃어넘길 사람들이야 언제나 웃어넘기겠지만, 의외로 <트와일라잇> 극장판 시리즈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감독들을 거치며 천천히 진화하고 있다. 케이크에 딸기 대신 키위를 얹은 격이라고? 그래도 딸기와 키위는 엄연히 맛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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