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BIFF Daily > 14회(2009) > 영화제 소식
황홀한 공포를 선사하리라
김도훈 2009-10-12

특별전 상영작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이탈리아 호러의 제왕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 세계

<딥 레드>

다리오 아르젠토는 이탈리아 호러의 제왕이다. 팬들이야 잘 알고 있을테지만 아르젠토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그의 경력을 조금 풀어보자. 그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걸작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9) 등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의 각본가로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1970년 <수정 깃털의 새>를 내놓으며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새로운 물결을 열어젖힌 아르젠토는 이후 <딥 레드>(1975) <서스페리아>(1977) <인페르노>(1980) <페노미나>(1985) <오페라>(1987) 같은 작품들을 내놓으며 현대 호러영화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현대 호러영화의 역사에서 아르젠토 만한 영향력을 가진 감독은 웨스 크레이븐, 조지 로메로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장화, 홍련> <폰>에 영향 준 독보적인 스타일

하지만 아르젠토의 영험한 명성은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의 작품들에 머물러 있다. 1990년대부터 다리오 아르젠토는 심각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걸 슬럼프라고까지 표현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만, 90년대 이후 아르젠토의 영화들이 완성도에 일정 정도 결함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트라우마>(1993) <스탕달 신드롬>(1996) <오페라의 유령>(1998) <카드 플레이어>(2004)는 전성기의 영화들에서 느껴졌던 거의 몽환적이라 할 만한 매력이 조금 거세되어 있다.

게다가 시대도 변했다. 다리오 아르젠토는 좋은 호러영화 감독이지만 좋은 이야기꾼은 절대 아니다. 언제나 지적받았던 삐걱거리는 스토리텔링은 아직도 여전하다. 영어 더빙이 입혀진 대사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이다. 진지한 평론가들이 여전히 아르젠토를 작가라고 부르기 머뭇거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젠토의 진정한 장점은 이야기나 대사가 아니다.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기막힌 스타일이다. 아르젠토 작품들을 관통하는 현란한 색채와 프로덕션 디자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힘을 잃지 않는다. 게다가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나 안병기의 <폰> 등 수많은 90년대 이후 한국 호러영화들이 아르젠토로부터 시각적인 매력을 고스란히 빌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있다.

<지알로>

아르젠토식 지알로의 모든 것, <지알로>

올해 부산영화제의 다리오 아르젠토 특별전은 특별히 ‘지알로’(giallo)에 주목하고 있다. 지알로는 이탈리아어로 ‘노란색’을 의미한다. 192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누린 노란색 표지의 싸구려 장르 소설들로부터 기원한 ‘지알로’는 현재 이탈리아 호러 스릴러를 일컫는 데 쓰이는 단어다. 아르젠토의 모든 영화들이 지알로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초자연적 테마가 가미된 <서스페리아> <페노미나>, 아직 국내 개봉하지 않은 <눈물의 마녀>는 지알로가 아니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보게 될 아르젠토의 영화들은 지알로 장르에 속하는 걸작들이다. 그의 첫 장편인 <수정 깃털의 새>(1969)와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고양이>(1970)는 아르젠토식 지알로의 원형을 제시한 작품들이고, <딥 레드>는 아르젠토 스타일과 지알로의 진수라고 평가할 수 있는 걸작이다(<딥 레드>는 <슬립리스>(2001)와 느슨하게 연결되는 작품이라고 봐도 좋다).

무엇보다도 올해 부산영화제의 아르젠토 마니아들이 기다리는 작품은 신작 <지알로>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아르젠토식 지알로가 다루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탈리아의 거리에서 납치당하는 외국인 여자들, 그들의 살을 찢는 살인마, 그리고 그들을 쫓는 경찰과 여자. <지알로>는 지알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단점(일찍이 이야기한 허술한 스토리텔링과 대사 등)과 장점(환각적으로 근사한 몇번의 살해 장면)이 모두 들어있다. 아르젠토의 팬이 아니라면 헛웃음을 지으며 극장을 나설 테고 팬이라면 키득거리며 소리를 지르게 될게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창의력에 다시 불이 붙었다는 건 지난 몇 년 간의 행보가 증명한다. 그는 호러영화의 대가들이 모두 투입된 TV 시리즈 <마스터즈 오브 호러>에서 최상급의 호러 단편을 선보이며 또다시 팬들의 비명을 자아냈고, 2007년에는 ‘세 어머니’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눈물의 마녀>를 선보였다. <눈물의 마녀>는 고르지 못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 옛날 아르젠토의 영화들이 보여주던 저질스럽고 욱신거리는 날 것 그대로의 공포는 여전히 근사하게 살아있다. 아르젠토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여전히 아르젠토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