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워터게이트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게 어때요?’” <계엄령>(1973)의 영어 더빙판 작업을 하며 뉴욕에 머물 당시 가진 한 인터뷰에서 코스타 가브라스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한 가지 종류의 영화, 그러니까 그의 대표작인 <Z>(1969) 같은 ‘정치 영화’만을 만들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영화 작업을 하는 데 일종의 ‘압력’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실은 별 상관없다는 듯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고 마침내는 민감한 정치 문제를 다루는 대중영화를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그런 유의 영화를 생각하지 않고 그의 영화를 보러가는 관객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상업영화에서 정치를 말하다
그런데 사정은, 시간을 조금만 되돌아가보면 많이 달랐다. <Z>를 만들기 위해 코스타 가브라스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 때 그가 만난 제작자들은 그의 시나리오를 보며 거의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것은 정치 영화군요. 사람들은 영화에서 정치 상황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요.” 코스타 가브라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렵사리 만들어진 <Z>가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되자 정치 영화에 대한 제작자들의 그와 같은 냉담한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코스타 가브라스는 상업영화계 안에서 다루는 소재의 범위를 넓히는 데 기여한 영화감독으로도 평가할 만 하다.
여하튼, 코스타 가브라스에 대한 논의는 이런저런 이유로 <Z>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그리스의 좌파 정치인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가 1963년 암살당한 사건을 다룬다. 코스타 가브라스가 이런 정치적 스캔들을 스크린에 그리려 한 것은, 그 자신의 말대로 그의 태생과 무관한 일은 아니다. 그리스 출신인 그는 당국으로부터 정치적 의심을 받는 러시아 이주민 아버지를 둔 탓에 그리스에서는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결국 열 아홉 살에 파리로 와서 소르본느에서 문학을 전공했다가 걸음을 옮겨서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 교육 기관인 IDHEC에서 수학한 후 영화계로 진입했다. 그는 나중에 정착한 이 나라가 자신에게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프랑스에 사는 그리스인 망명자라기보다는 프랑스 시민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1967년 그리스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이후로 출신지의 끔찍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무언가 구체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코스타 가브라스는, <Z>는 무엇보다도 벽에다가 반체제 구호를 쓰는 것과 같은 정치행위였다고 말한다.
물론 <Z>가 마냥 정치 팸플릿 같은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코스타 가브라스가 한편으로 람브라키스 사건에서 찾아낸 것은 음모 이야기의 요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영화에는 묵직한 정치적 메시지만이 아니라 암살과 그 사건의 수사, 정부의 타락상이 엮인 흥미진진한 스릴러 스토리 역시 실려 있게 된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빠른 템포 안에다가 이 이야기 요소들을 녹여내면서 그것들이 지닌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살려놓는다. 이렇게 영화를 정치적 외침을 가진 스릴러로 만드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관객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적 전략이라고 볼 만할 것이다.
바로 이런 전략 덕분에 영화는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는 관객들에게도 공포, 분노, 좌절, 슬픔 같은 보편적인 감정을 유발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 속 상황의 보편성을, 즉 그 이야기는 민주적 시스템이 멈춘 곳이면 어디에서든 적용되고 그래서 바로 자신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감지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1966)가 알제리에 대한 영화가 아닌 것처럼 <Z>는 그리스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며 이렇게 썼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영화이다.”
현실을 스릴러·멜로의 화법으로
코스타 가브라스의 세 번째 장편영화인 <Z>는 그의 이후 행보를 확정해준 영화로도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만하다. 이 영화 이후로 그는 ‘코스타 가브라스적’이란 용어를 기꺼이 붙여도 될 만한 영화들을 계속해서 만들어갔다. 미국의 남미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개입을 다룬 또 다른 대표작들인 <계엄령>이나 <의문의 실종>(1982)의 실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영화들이란 대체로 정치 권력의 추악함이 드러나는 현실로부터 소재를 구해 와서는 그 이야기를 스릴러나 멜로드라마의 대중적인 어법으로 들려주는 것들이었다. 이런 코스타 가브라스적인 영화들은 평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거나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혹은 관객들의 관심과 애정을 얻어냄으로써 적지 않은 보답을 받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들에 이런저런 의심과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는 정치 문제를 다만 상업화할 뿐이고 또 그러기 위해 현실을 단순화해서 본다고 불평했다. 예컨대, 데이비드 톰슨 같은 영화평론가는 코스타 가브라스의 후기 영화들은 확실히 힘이 부친다며 그것들에는 실제 정치는 자기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점에 대한 코스타 가브라스 스스로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는 형식 자체의 정치화라는 문제를 거론할 것이다. 진부한 형식의 영화를 가지고서는 관객의 순간적인 감정을 건드릴 순 있어도 관객의 진정한 각성을 이끌어낼 순 없을 것이란 논의에서 코스타 가브라스는 손쉬운 공격의 표적이 된다. 이 같은 다소 복잡한 논의에서 공격을 받을 경우에도, 여하튼 코스타 가브라스가 정치와 그 영화적 재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문제를 던져준다고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다른 진영에서도 줄기찬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비판을 받은 기존 권력층은 고소라는 방법으로, 보수적인 언론에서는 비주얼이 담긴 이데올로기라는 비난으로 그를 가격하려 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우리는 대중영화감독으로서 그가 가진 남다른 미덕 하나를 발견해낸다. 그것은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 혹은 용감함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줄곧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작업하면서도 그는 다른 상업영화감독들이 감히 꺼내놓을 수 없는 문제를 계속해서 스크린으로 가져왔다. 심지어는 <의문의 실종>의 경우에서 보듯 유니버설에서 작업하면서도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 정도로 신념의 굽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영화감독이 바로 코스타 가브라스다.
그렇다고 해서 비방자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를 두고 거침없는 영화 프로파간디스트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지칭이 틀린 것은, 일단 그는 휴머니즘 이외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자기 영화가 여느 프로파간다 영화처럼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영화가 성냥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큰 불을 놓을 수도 있지만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자극을 주는 것이고 사고의 여지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가 ‘정치 영화’인 것은 단지 그 안에 정치문제가 담겨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그 같은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