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회 칸 영화제의 스타는 경제 위기가 될 것인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의 헤드라인이다. <르몽드>에 따르면 개막 며칠 전까지도 해변가 호텔 예약이 만료되지 않아서 관계자들의 근심을 샀다. 참가 인원이 감소한 탓에 칸 지역경제도 예년만큼 영화제 덕을 보지 못할거란 예측이 나온다. 각종 파티에 음료를 제공하는 업체에 따르면 "예년이 샴페인이라면 올해는 로제나 스파클링 와인"이란다. 칸 최대의 파티로 매년 흥청망청했던 ‘<베니티 페어> 파티’마저 취소됐다. 경제 위기에 축제가 왠말이냐는 질문이 나올때마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는 영화제가 지방경제에 끼치는 기여도를 거론하느라 바쁘다.
이쯤되면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이 잘 알려진 거장들의 작품에만 집중한 것도 이해가 간다. 위기에는 안정이 필요하다. 불황의 시기에는 모두가 믿을만한 이름에 기대이게 되어있는 법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라스 폰 트리에, 쿠엔틴 타란티노, 켄 로치, 리안, 알랭 레네, 제인 캠피온, 미하엘 하네케 등, 이미 칸에서 명성과 돈을 얻어간 경험이 있는 거장들의 이름만 가득하다. 티에리 프레모는 인터뷰마다 "감독 이름이 아니라 작품이 좋아서 선정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올해 영화제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발굴이 아니라 발전이다. 작년 영화제가 <바쉬르와 왈츠를>이나 <클래스>처럼 기대치 않은 걸작을 발굴하는 재미를 선사했다면, 올해 칸은 명장들의 발전을 감식하는 즐거움을 안겨줄거다.
하나의 경향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영화도 단단히 자리를 채우긴 했다. 올해 칸에 도착한 한국영화는 역대 최다 초청편수인 10편이다. <박쥐>는 공식경쟁부문, <마더>는 주목할만한 시선, <경적>과 <남매의 집>이 시네파운데이션에서 공개된다.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은 칸 클래식 부문에서 상영된다. 심사위원 이창동이 제작한 우니 르콩트의 한불 합작 <여행자>는 비경쟁 특별상영 부문에 초청받았다(<여행자>에는 고아성, 김새론, 설경구 등 한국배우들이 출연한다). 한편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먼지아이>는 비공식 부문인 감독주간에, 문성혁 감독의 <6시간>은 비평가 주간에서 선보인다. 노경태 감독의 한불합작영화 <허수아비들의 땅>은 프랑스독립영화배급협회 프로그램에 선정됐다. 배두나는 고레다 히로카즈의 신작 <공기인형>으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았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창동은 "경쟁부문의 한국 작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인가"라는 시덥지 않은 질문에 명언으로 답했다. "칸 영화제 기간 동안 나의 국적은 영화다". 칸 영화제에 모인 인간들의 국적은 영화다. 낯간지러운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만, 불황의 시기일수록 결국 필요한 건 국적없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믿음 아니겠는가. 제62회 칸영화제는 5월24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제62회 칸 영화제 개막작 <UP> 프리뷰
픽사의 신작이자 칸영화제 개막작인 <UP>은 고색창연한 모험영화다. 주인공 칼은 소녀 엘리와 함께 남미로의 모험을 꿈꾼다. 둘은 결혼해서도 여전히 같은 꿈을 꾸지만 생활에 얽매여 모험을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엘리는 세상을 뜬다. 홀로된 70대 노인 칼은 집을 노리는 부동산업자들의 계략에 빠져 양로원으로 쫓겨날 처지가 되지만 수만개의 풍선으로 집을 띄워 죽은 아내와 약속한 모험을 떠난다. 성가신 보이스카웃 꼬맹이 러셀 역시 모험에 무임승차한다. 칼과 러셀은 마침내 도착한 남미의 정글에서 (멸종한 모아새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새 ‘케빈’과 친구가 된다. 그런데 칼은 자신의 어린시절 영웅이었던 전설적인 모험가 찰스 먼츠가 여전히 살아있으며, 말하는 기계를 장착한 수백마리의 개들을 훈련시켜 새 ‘케빈’을 잡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UP>은 <월·E>의 시적인 낭만과 <몬스터 주식회사>의 동화적인 감수성을 극대화시킨 픽사 최대의 오락거리 중 하나다. 동시에 (칸영화제 개막작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자축이기도 하다. 픽사는 고전 할리우드에 대한 오마주를 영화속에 잔뜩 끌어들이고 있는데, 영화광들이라면 채플린과 히치콕, 코난 도일과 해리 레이하우젠의 영향력을 발견하며 웃음 지을 수 있을게다. 후반부의 눈과 입이 딱 벌어지는 비행선 위에서의 공중전 장면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산을 향한 아찔한 답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재미있게도 <UP>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란 토리노>를 연상시킨다. 고집스럽게 외부와 단절한 채 살아가던 노인은 아버지가 없는 아시아계 소년에게 미국적 낙천주의의 희망을 물려준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픽사의 감독들은 영화의 정치적인 의도를 묻는 질문에 "영화를 만들때 메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슬그머니 말을 피했다. 하지만 최상급의 오락거리를 향한 장인들의 노력에는 아름다운 메세지가 절로 깃들게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제작자 존 라세터가 인용한 디즈니의 말을 되새겨보자. "모든 웃음에는, 반드시 눈물도 있어야한다". <UP>은 그 말을 아름답게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