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들어 고다르가 처음으로 내놓은 영화인 <사랑의 찬가>는 분명 <영화사>(1998) 이후의 작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다르의 너무도 방대하고 야심적인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기도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찬가>에서 고다르는 또다시 20세기의 기억 혹은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의 영화가 맡은 역할의 문제를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1995)에서 고다르가 한 말은 “유럽에는 기억이 있고 미국에는 티셔츠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사랑의 찬가>에서도 고다르는 미국인은 역사도, 이름도 없는 존재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역사를 구매해서 자신들을 위한 기억으로 가공하려 드는 이들이라고 했다. 고다르가 보기에 중요한 점은 이 같은 사람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는 방식 역시 알지 못하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지배적인 위치에서 영화 카메라를 들고 있음으로써 영화의 무능력이 두드러지는 현재적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다르가 유럽의 상황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낙관적이라고 본다고 말하긴 어렵다. 예컨대 <사랑의 찬가>에서 그려지는 파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와는 달리 자기만의 독자적인 기억을 갖고 있긴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많은 기억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그곳은 유령의 도시, 과거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불길한 도시인 것이다. 게다가 고다르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구대륙에서도 예술의 가치가 쇠퇴하고 있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에서 그는 규칙의 문제이고 규칙의 일부인 문화와 예술이며 예술의 일부인 예외라는 개념을 서로 대립시킨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규칙을 이야기한다. 담배, 컴퓨터, 티셔츠, 텔레비전, 관광, 전쟁. 하지만 이제 아무도 예외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최근의 고다르에게서 <토킹 픽처>(2003)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와 유사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올해로 100살이 된 포르투갈의 대가처럼 벌써 80대를 바라보는 스위스 출신의 감독은 유럽의 역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왔고 그 황혼을 쓸쓸하게 지켜보는 존재인 것이다. <영화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다르라는 ‘나’의 구현인 그의 최근 영화들에서 어떤 멜랑콜리의 느낌이 강하게 풍겨난다면 그건 그 ‘나’의 고독함 때문인 것이다. <아워 뮤직>(2004)에서 고다르가 사라예보로 카메라를 가져간 것은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절박성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바로 사라예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라예보, 현재의 영화, 이들은 모두 추방의 공간들”이고 고다르 역시 추방 혹은 고립 안에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 같은 고다르의 자화상에, 어떤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초월적 자기 신비화의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가 전반적으로 영화의 퇴조를 겪는 세상과 절연하여 자기 영화 속에 고독과 사색과 혁신을 조화시킨 예외적인 인물, 그래서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에서 말하듯 이제는 전설이 되었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 된 것은 틀림이 없다.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 <사랑의 찬가> <아워 뮤직>, 고다르의 세편의 근작들을 4월12일부터 2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하는 ‘JLG/JLG: 고다르의 자화상 특별전’은 그의 최근 입지를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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