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스피릿과 함께 파티는 시작됐다. 제58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지난 2월7일 마틴 스코시즈의 롤링스톤즈 공연실황 다큐멘타리 <샤인 어 라이트>(Shine A Light)를 개막작으로 축제의 막을 올렸다. 올해 베를린은 예년의 허약한 리스트를 비웃듯 폴 토마스 앤더슨, 왕 샤오솨이, 마이크 리, 마지드 마지디, 에릭 종카, 야마다 요지, 두기봉, 에롤 스미스등 익숙한 거장, 혹은 그에 준하는 작가들의 이름들이 가득하다. <할리우드 리포터>를 비롯한 외신들이 올해 영화제가 예년의 부진을 가뿐히 넘어설 것이라 과감하게 배팅을 했던 것도 큰 억측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영화제가 중반에 가까워지는 2월10일 현재. 베를린의 분위기는 의외로 착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다. 첫날부터 2명의 심사위원 상드린 보네르와 수잔느 비에르가 ’개인적인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면서 주최측과 언론을 당황시킨 여파가 꽤 크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공식 부문의 영화들이 하나같이 기대 이하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멕시코의 신진 페르난도 에임브케의 <레이크 타호>(Lake Tahoe)가 약간의 비평적 호감을 얻어낸 것을 제외한다면 에릭 종카, 다미안 해리스, 이사벨 크와셋, 왕 샤오솨이의 신작들은 난도질에 가까운 악평들을 감수해야하는 처지다. 실재로 이 영화들은 영화적인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감독의 전작들에 크게 못미치는 편이다. 줄리아 로버츠, 윌렘 데포, 라이언 레이놀즈 등 스타급 연기자들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한국계 감독 데니스 리의 <정원의 반딧불들>(Fireflies In The Garden)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의 클리셰로 가득한 이야기와 지나치게 감상적인 결말 탓에 기자시사에서 의례적인 박수소리 한번 나오지 않았다. 첫날 상영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검은제국>이 만장일치의 걸작 대접을 일찌감치 얻어냈지만 이미 오스카 후보에 올라있는 작품인 탓에 신선함이 아무래도 덜하다는 단점이 있다. 아직은 파노라마와 포럼 부분에서도 크게 만족할만한 인기작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물론 축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따름이니 희비를 벌써부터 가리기는 이르다. 베를린이 언제나 주목하는 ’현실참여형 영화’들이 영화제 후반부에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는 것도 아직은 영화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쉽게 단정할 수 없도록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특히 선댄스에서 크게 주목받은 랜스 해머의 <발라스트>(Ballast)와 다큐멘타리스트 에롤 모리스의 <관리 운용 규정>(Standard Operating Procedure)는 이미 영화를 본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걸작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제58회 베를린영화제는 2월17일 미셸 공드리의 <비 카인드 리와인드>(Be Kind Rewind)와 함께 막을 내린다. 경쟁부문에 올라있는 홍상수 감독의 신작 <밤과 낮>은 2월12일 첫번째 공식시사를 시작으로 황금곰상을 향한 여정에 동참하고 파노라마 부문에 선정된 전재홍의 <아름답다>는 2월15일 첫 공식시사를 가질 예정이다. 그리고 베를린의 현재 날씨는 비평적인 날씨와는 상관없이 화창하고 맑다.
개막작 <샤인 어 라이트>
올해 베를린의 포문을 연 작품은 마틴 스코시즈의 롤링스톤즈 공연실황 다큐멘타리 <샤인 어 라이트>다. 하지만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여느 뮤지션들의 공연실황 DVD를 떠올리지 마시길. 스코시즈는 일반적인 공연실황 다큐멘타리의 관습과는 달리 관객들의 흥분한 얼굴 한번 클로즈업 하지 않는다. 대신 60여대의 숨겨진 카메라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밴드 멤버들의 주름살이 만들어낸 자글자글한 피부의 굴곡들. 그리고 스코시즈는 카메라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실황 사이에 이팔청춘 밴드 멤버들의 오래된 인터뷰 클립들을 유쾌하게 삽입한다. 영화의 궁극적인 주제가 분명해지는 것은 천진난만한 소년 믹 재거가 뽀얀 얼굴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젊은날의 재거는 "60이 되어서도 지금처럼 공연하는 걸 상상할 수 있냐"는 기자의 말에 답한다. "물론. 식은 죽 먹기지"(Yeah. Easily). <샤인 어 라이트>는 CJ엔터테인먼트가 베를린영화제 이전에 이미 구매해 둔 작품이니 롤링스톤즈의 팬들이라면 (아마도) 영원히 성사되지 않을 내한공연의 아픔을 충분히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중구난방 정신없었던 기자회견 발췌요약.
마틴 스코시즈: 베를린에 온게 1981년이후 처음이다. 그때는 <분노의 주먹>이 개막작이었다.(회견장 박수) 게다가 이 영화는 논픽션으로서는 처음으로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라고 들었다. 아주 영광스럽다.
Q: 이전 영화에서도 롤링스톤즈의 음악을 많이 사용했다. 그들의 음악이 당신 영화와 통하는 지점은 뭔가. 키스 리처드: 우리는 노래가 아주 많잖아. 그러니 어떻게든 묶어지기 마련이지.(회견장 폭소) 마틴 스코시즈: 그들 음악은 내 인생의 일부분이다. 사실 70년대 초반까지는 그들의 공연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의 음악은 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비열한 거리>와 <카지노>까지 스코시즈 영화에는 스톤즈의 노래들이 삽입되어 있다). 음악의 본성이란건 영속적인 것이니까. 믹 재거: 한마디 덧 붙이자면, 이 영화는 <Give Me Shelter>가 유일하게 들어있지 않은 스코시즈 영화다.(회견장 폭소) 마틴 스코시즈: 아. 그러고보니 그러네.
Q: 이 다큐멘타리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동기가 뭔가. 마틴 스코시즈: 이건 다큐멘타리가 아니라 공연 실황이다. 여튼 스톤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언젠가는 그들과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뭐랄까. 불명료한 내 욕망의 대상이었달까. 그들의 음악에 신들려 있으니 찍는 것도 정말 즐거웠다. 키스 리처드: 엄청나게 많은 카메라가 있었지. 마틴 스코시즈: 60여대 정도였다. 키스 리처드: 찍을 땐 그렇게 많은 카메라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다.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면 아무래도 퍼포먼스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Q: 큰 화면으로 스스로를 보는 기분은 어떻던가. 믹 재거: 너무 좋더라.(회견장 일동 박수) 키스 리처드: 아이 러브 잇! 드러머 찰리: 나는 싫어.(일동 폭소) 믹 재거: 찰리 너 멋있던데. 키스 리처드: 지금까진 좋지 찰리. 지금까진.(회견장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