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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배의 삶을 가르쳐준 선생님
홍성남(평론가) 2007-10-05

특별전 ‘에드워드 양: 타이베이의 기억’으로 만나는 고 에드워드 양 감독의 작품 세계

2007년은 시네필들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몇몇 영화의 거장이 이 세상을 뜬 한 해로 기억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게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에드워드 양의 죽음은 각별하다. 이것은 단지 한 재능있던 ‘변방’ 영화인의 죽음으로 여겨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두고 장 뤽 고다르의 시대, 혹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시대에 비해 영화가 아주 급격히 퇴조하지만은 않은 때라고 간주하며 희망의 촛불을 끄지 않는 것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허우 샤오시엔, 그리고 에드워드 양 등이 영화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드 양의 죽음은, 다소 과장하자면, 잉그리드 베르히만의 죽음과 달리 지금 이 시대의 영화적 풍경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사 안에서 에드워드 양은 우선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만 뉴웨이브의 기수로 기록되어 있다. 문이 활짝 열린 그의 집에서 허우 샤오시엔이나 우 니엔쩐 같은 이들이 얘기하고 술 마시면서 대만 뉴웨이브의 꽃이 피었다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에드워드 양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1953년에 윌리엄 홀든이 웨스턴 영화에서 말을 타고 스크린을 가로지를 때 그의 연기는 약 25년 후에 시작될 대만 뉴웨이브의 무대를 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처럼 어린 시절의 에드워드 양은 만화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에 심취했었다. 그래서 한 때 그의 꿈은 창의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을 결합할 수 있는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착한 아들’이 되고자 했던 그는 그 꿈을 접고 전기공학과 컴퓨터 디자인을 공부했고 미국에서 하이테크 기술자로 일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베르너 헤어조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에드워드 양에게 이제껏 보지 못했던 영화 만들기의 정신을 알려줬다. 그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오랜 꿈을 더 이상 나이가 들기 전에 실현하고 싶어했다. 대만에 돌아온 그는 결국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1982)로 대만 뉴웨이브의 시초를 마련했다. 이제 우리가 잘 아는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에드워드 양의 대표작을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은 거의 주저 않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을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에드워드 양의 이 야심작을 이야기하자면 적지 않은 평자들이 허우 샤오시엔이 만든 현재까지 가장 유명한 작품인 <비정성시>(1989)를 함께 거론한다는 점이다. 동갑인 데다가(1947년생) 본토에서 건너온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서로의 (초기) 영화들에 도움을 준 사이인 이들 둘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립항을 만들어 이야기하길 즐긴다. 예컨대 허우 샤오시엔이 다소 직관적인 방식으로 영화작업에 임한다면 에드워드 양은 모든 것을 사전에 계산하는 완벽주의자에 가깝고(그래서 그는 작품 수가 많지 않다), 전자가 주로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매진했다면 후자는 특유의 도회적 감수성으로 현재를 탐구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이처럼 예민한 현재의 감각을 갖고 있는 에드워드 양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는 1960년대 초반이라고 하는 다소 낯선 역사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이것을 두고 <비정성시>라고 하는 허우 샤오시엔의 야심작에 대한 에드워드 양의 (규모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 야심적 응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대만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다뤘다고 하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우선 이것이 그리고 있는 육중한 역사의 무게를 지배적인 공기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에밀리 유에-유 예와 대럴 윌리엄 대니얼스는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 양이 담아낸 그 같은 공기를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란 용어를 도입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것은 복도나 창문, 통로, 혹은 다양한 종류의 틀을 가지고 롱숏을 만들어내는 스타일을 말한다. 이런 형식이 경우에 따라 심도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어떤 공간을 어둠으로 감싸는가 하면 주목해야 할 대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를 통해 결국에 암암리에 제시되는 것은 학교나 군대, 감옥 같은 제도의 강력한 존재감이고 구속이나 감시와 같은 통제의 행사에 대한 감각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에드워드 양은 정교한 미장센으로 두터운 화면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주제의식과 상응하는 하나의 소우주를 축조해낸 것이다. 꽤 많은 인물들이 관련된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동일한 공기를 호흡한다. 그것은 영속적인 추방의 감각이고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달리 선택할 공간이 없다고 하는 답답함이다. 결국 주인공 샤오스가 저지르게 되는 비극적인 행위는 단순히 그가 행한 것이 아니라 어떤 ‘구조’가 거의 운명처럼 그를 그것에까지 끌고 간 것처럼 보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런 식으로 개인과 그를 몰고 가는 역사의 비극적 공명을 정교한 미장센 안에 담아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앞서 말한 것처럼 에드워드 양의 가장 잘 알려진 영화이고 그의 세계 안에서도 어떤 분수령에 해당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장 그다운 영화인가에 대해서는 사실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오히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에드워드 양의 세계 안에서 이례적인 작품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에드워드 양의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려본다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전의 작품들, 즉 <해탄적일천>(1983), <타이베이 스토리>(1985), <공포분자>(1986)가 하나의 범주에 속하고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후의 두 작품인 <독립시대>(1994)와 <마작>(1996)이 또 다른 범주를 형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마지막 작품이 된 <하나 그리고 둘>(2000)은 일종의 에필로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전자의 군집에서 후자의 집단으로의 변화는 대체로 근대화를 맞이하는 사회와 그 속에 던져진 인물에 대한 다소 냉정한 응시에서 이미 현대의 다른 시기에 도달한 사회에 대한 혼란스럽게 코믹한 시선으로의 이월 쯤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에서 에드워드 양적인 드라마의 요소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사라지거나 실종된 사람들이란 모티프나 배신의 주제는 그의 영화들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많은 경우 돈에서 비롯되어서 관계의 회복되지 않은 상황 쪽으로 귀결된다. 흔히 에드워드 양의 영화들을 두고 고독한 사람들을 그린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이 어떤 진공 상태 속에서의 고독과 소외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양의 세계 속 인물들의 고독과 그들의 관계의 파탄에는 급속하게 바뀌거나 이미 기막힌 변화를 완료했다고 하는 사회경제적 기반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자본주의적 ‘현재’의 개념과 상호작용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에드워드 양이 여성을 현재의 혼란스런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인물로 그리는 반면에 남성은 그것이 만들어낸 새로운 질서에 대처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타이베이 스토리>에서의 아룽을 생각해보라). 에드워드 양의 관점에서 현대 도시는 남성 정체성의 위기를 낳을 때가 많은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후에 만든 두 영화들(<독립시대>, <마작>)에서 에드워드 양은 과거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현대 도시를 그려냈다. 이제 타이베이라는 도시는 다른 이름의 거대 도시와 이름을 바꿔도 상관없을 포스트모던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하나 그리고 둘>은 이 같은 자취가 사라지지 않은 공간 위에서 앞의 영화들에서 연출되었던 부조리극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에드워드 양의 영화이다. 비애의 정서 안에서 삶을 성찰하는 이 영화는 에드워드 양의 새로운 길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가 되고 말았다. 이 영화 속에서 ‘뚱보’라는 별명의 남학생은 삼촌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정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영화가 발명된 후로 인간의 수명은 세 배나 늘었대.” 이건 사실 에드워드 양 자신의 영화적 믿음 같은 것이었다. 그는 영화감독이란 삶에 가까운 경험을 관객에게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관객은 자연 여분의 삶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양은 그 자신이 우리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도움을 준 그런 감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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