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독립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제작부터 상영까지 변방에 있는 한국독립영화들의 새로운 흐름은 오히려 영화제에서 먼저 빛을 발한다. 제1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또한 한국독립영화의 성찬을 마련했다. 단, 영화제 성격에 맞게 매우 판타스틱한 독립영화들이다.
올해 부천에 입점한 독립영화들의 특징은 장르의 쾌감과 변주에 주목한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이 인생의 허무를 깨닫거나 미래의 불안을 담아온 것에 비해 이들의 시도는 독립영화계 전체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금지구역 상영작 중 하나인 김진원 감독의 <도살자>는 말 그대로 ‘작정하고 만든’ 하드고어 영화다. 아마도 <도살자>를 본 관객은 배우들의 신변과 영화를 만든 ‘데빌그루브픽쳐스’가 도대체 어떤 일당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온 한 부부가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로부터 사지가 찢기는 봉변을 당하는 게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등장인물들의 머리에 카메라를 매달아 P.O.V(Point-Of-View)숏으로 찍은 이 영화는 거친 화면과 사운드로 아비규환의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톱에 갈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이 귀청을 때린 뒤에는 뼈를 부러뜨리고, 손가락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는 광경이 여과없이 눈앞에 펼쳐질 정도다. 이 모든 게 쇼였다는 반전을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도살자>는 그런 자비심 따위는 갖추지 않은 영화다.
장르영화의 활약이 두드러져
<도살자>가 저예산 독립영화의 제작환경을 드러내며 영화의 매력을 더한다면 <편지>와 <산책>을 연출한 이정국 감독과 영상원 4학년생인 김민숙 감독이 공동연출한 <그림자>는 저예산의 장점을 통해 영화의 군살을 뺀 경우다.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논개가 적장 기무라를 죽이지 못하고 혼자 죽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논개를 진심으로 사랑한 기무라는 논개의 죽음을 애도하고, 논개는 그런 기무라의 꿈과 현실에 나타나 조금씩 그의 숨을 죄어온다. 몇 백년 뒤의 현실로 넘어온 영화는 기무라와 논개, 그리고 논개의 연인 최경회의 삼각관계를 또 다른 구성으로 풀어간다. 패랭이꽃을 찾으러 산을 찾은 두 연인과 산을 안내해 주겠다는 한 남자 사이에 흐르는 갈등은 과거의 이야기와 맞물려 또 다른 반전을 만들어낸다. 1편과 2편으로 나뉜 <그림자>는 2억원이란 저예산을 미술과 내러티브에 알뜰히 사용한 흔적을 보여준다.
<도살자>나 <그림자>와는 다르게 무협장르에 신선한 감각을 더한 영화도 있다. 여명준 감독의 <도시락>은 도심 속에 숨어 있는 무술고수들의 고민과 우정, 의리를 다룬 작품이다. 사적복수가 허용되는 영화 속의 한국에서는 만 20살 이상의 성인이면 누구나 경관 1명과 공증인 1명이 있는 자리에서 원하는 사람과 결투를 벌일 수 있다. 주인공 영빈은 회사에서는 무능한 직원이지만, 결투의 세계에서는 백전백승의 숨은 고수. 어느 날 친구 운광의 무술도장을 찾은 그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닮은 본국을 만나고 이들 세 남자는 결투의 환란속에서 또 다른 운명의 만남을 맞이한다. <도시락>은 배우들의 액션연기와 은근한 유머가 잘 조화된 작품으로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공들여 만든 액션과 무협영화에 대한 애정이 눈에 띈다. 특히 연출, 시나리오, 편집, 미술, 무술 등 1인 5역을 한 여명준 감독의 메이저 진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예산을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성 보여줘
제11회 부천영화제가 발견한 한국독립영화의 또 다른 모습은 ‘변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자기 반성적인 시선이다. 2007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김삼력 감독의 <아스라이>는 대구 독립영화 출신인 감독이 직접 겪은 20대의 성장기를 다루는 이야기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영화의 세계에 매료된 주인공은 영화를 향한 갖가지 꿈을 꾸지만 점점 현실과의 괴리에 부딪히며 좌절을 겪는다. 문화의 변두리인 지방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어려움과 좌절, 희망을 흑백의 영상으로 담은 <아스라이>는 단지 영화를 만드는 이들뿐만 아니라 20대를 살고 있거나, 그 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우열 감독의 <소년 감독>은 영화가 찍고 싶은 아이의 시점에서 영화 만들기의 순수성을 생각해보는 작품이다. 강원도 산골마을에 사는 소년 상구는 어느 날 아버지의 유품인 8mm 카메라를 갖게 된다. <소년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상구가 서울로 상경해 겪는 갖은 고충을 담지만 아이의 모험을 통해 감동을 끌어내려하지 않고, 대신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인 색채를 가미하며 쓰디쓴 엔딩을 맞이한다. 이야기만 놓고보자면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윤제문, 김상호 등 낯익은 조연배우들과 주연을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독립장편영화뿐만 아니라 단편영화들 또한 영화제에서 맛볼 수 있는 진미다. 독특한 상상력과 강렬한 영상이 단편영화의 고유한 장점이지만 부천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단편영화들은 특히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에 선정된 10개의 단편영화들 가운데 한국단편영화는 총 4편이다. 한병아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두가 외로운 별>은 이미 지난 6월25일 미국에서 열린 플랫폼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진출한 작품. 성격과 생활 모두에 하나 이상의 장애를 겪고 있는 인물들은 저마다 외롭지만 슬퍼하지 않는다. 인상적인 캐릭터 구성과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연대의식에서 벗어난 주제가 돋보인다. 그런가 하면 황보임 감독의 <루치아의 자동인형>은 영화 메커니즘의 흥망성쇠를 <노스페라투> 같은 공포영화와 멜로영화의 특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볼렉스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이안식 무반사 카메라로 불리며 폐품처리가 될 지경에 이른다. 그를 사랑하는 여자는 어떻게든 남자를 살리려고 하지만 세상은 이미 HD카메라의 선명한 화질에 빠져 있다. 디지털 메커니즘이 창궐하는 현대에 아날로그 기계의 아날로그적 사랑을 그리는 영화로 무성영화적인 연출이 색다른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 기자였던 장훈 감독의 <불한당들>도 발칙한 상상력과 풍자가 눈에 띄는 영화다. 영화는 월드컵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집단의식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좀비영화로 풀어낸다. 부천 초이스에 선정된 단편영화중 마지막 작품인 <汗(한)>은 제목 그대로 땀이 솟고 흐르는 풍경을 유장한 리듬과 연출로 그려낸 영화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영상이 땀의 액체성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땀 흘리는 자와 안 흘리는 자, 그리고 노동으로 땀을 흘리는 자와 먹고 섹스하는 걸로 땀을 흘리는 자의 대비를 통해 계급의 격차를 논하기도 한다.
부천 초이스,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의 단편들도 뛰어나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의 상영 편수가 적다는 사실이 불만인 관객이라면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에 선정된 단편들의 홍수에 빠져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부천영화제의 상영부문 중에서 관객의 가장 높은 호응을 받아온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부문은 총 58편의 단편영화 중 28편의 한국단편영화를 소개한다. 특징으로 보면 호러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거나 비트는 영화들이 많다. 고등학교 3학년인 세 여고생의 추억회상담인 <버스를 타다>는 <여고괴담>과 같은 학원괴담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설프지 않은 피의 향연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아이들이 떠난 잠깐의 외출을 통해 거대 도시 서울의 이면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다>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유령영화다. 또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생체과학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미래사회를 그린 <뼈칼>은 묵시론적이면서도 좀비영화 같은 특징이 반영된 작품이다.
한편 평범한 일상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영화들도 도드라진다. 축농증으로 고생하는 천재소녀의 코에서 검은 생물체가 빠져나오고 그로 인해 그녀의 지적능력이 점점 저하되는 과정을 그린 <Gift>나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하룻밤을 판타지로 풀어낸 <자야 한다>, 그리고 무허가 쪽방촌에 사는 한 소년과 신비한 소녀의 만남을 담은 <미유>가 그러한 작품들이다. 또한 유기견이 자신을 버린 가족에게 복수한다는 <가족 같은 개, 개 같은 가족> 같은 독특한 작품도 있다. 28편의 한국단편영화들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은 가족 안의 관계를 판타지적인 색채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17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러 다니는 소년의 여정을 담은 <들리나요?>와 전파상의 고장난 텔레비전으로 죽은 엄마와 교신하는 <보이지 않는 천국>,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아들 사이의 애증을 미스터리로 풀어낸 <프랑스 중위의 여자>,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쌍둥이 형제가 사라진 사실을 깨닫게 된 아이를 그린 <늪 속의 괴물>이 있다.
이 밖에도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려는 남자의 이야기인 <꿈의 해부>, 통일한국에서 만난 북한 소년과 소녀의 희망을 그린 <서울까지>, 우연히 얻은 권총으로 갱영화를 찍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굿바이 칠드런>, 그리고 ‘제6회 미쟝센단편영화제-장르의 상상력展’에서 대상과 촬영상을 받은 <10분간 휴식> 등이 단편영화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줄 것이다. 배부를 만큼 보고 토할 만큼 즐겨도 된다. 어차피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