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물론이다.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하이킹을 가지 않았다면, 동굴에서 골룸 사촌들에게 내장을 뜯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디센트>). 텍사스로 가지 않았다면 그 무시무시한 전기톱 소리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이 모든 게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혹은 한순간에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인간의 마음이라지만, 공간 자체가 주는 공포도 만만치 않다. 본격적인 바캉스 시즌이 돌아오기 전, 미국 지도를 꺼내 여러분의 행선지를 체크해보시라. 피를 부르는 호러 패키지 8개가 막 꾸려졌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센트>
골룸 사촌들과 함께하는 동굴탐험
여행지: 북아메리카 동부에 위치한 애팔래치아 산맥 어디쯤. 그중에서도 휴대폰이 안 터짐은 물론이고, 인적도 없고 지도에조차 표시되지 않은 동굴 속. ‘사서 하는 고생’ 컨셉의 여행지로는 안성맞춤.
동행: 적당히 인생의 쓴맛을 본 여섯 여자. 가공되지 않은 대자연을 만끽하며, 일상의 찌질한 고민을 타파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일행과 평소 개운하지 않은 사이였다면, 여행 도중 관계 개선을 기대해볼 수도 있겠다. (과연?)
준비물: 손전등과 두둑한 건전지는 필수. 갇힐 때를 대비해 탈출구 제작용 수류탄, 비옷, 튼튼한 밧줄과 목장갑, 약간의 응급조치 상식, 좁은 동굴을 통과할 때를 위해 사전 다이어트 감행 필수.
체험 하이라이트: 괴로운 과거를 돌이켜보는 명상의 시간을 거쳐, 떠나기 전 일행끼리 친한 척 사진 한방 찍기. 지도는 개무시, 가장 음습한 동굴로 들어가 길 잃고 일행과 다투기. 이 과정에서 준비물을 분실한다거나 일행과 흩어지는 사고는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 지레 겁먹지 말 것. 일단 여기까지는 워밍업! 골룸 사촌뻘 되는 괴생물체가 나타나는 순간, 당신의 공포체험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이후에는 어둠 속에서 골룸 사촌과 이종격투기 하기, 난도질, 눈알 으스러뜨리기, 숨바꼭질, 그리고 약간의 부상과 이 모든 과정의 무한반복.
주의사항: 비관적인 상황 전개 때문에 ‘노력해봤자 희망 따윈 없다’는 비관적인 인생관 팽배. 여행이 끝나면 가슴이 체한 것처럼 답답해지거나 폐쇄공포증으로 인한 호흡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음.
<힐스 해브 아이스>
모래바람 맞으며 식인 카니발 체험
여행지: 뉴멕시코주 사막, 낡은 주유소 외에는 사방이 모래언덕뿐인 황무지. 대기권 핵실험 결과,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유전자 돌연변이들의 마을로 추정됨. 물론 미국 정부는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음.
동행: 가족애가 별로 없는 일가족. 큰소리 뻥뻥 치는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결혼한 딸 내외와 손녀, 한데 어울리기 싫어하는 둘째딸과 막내아들 그리고 일당백의 역할을 하는 개 두 마리.
준비물: 사막의 변덕스런 날씨를 피할 수 있는 안락한 캠핑 트레일러, 무전기, 선탠 크림, 망원경, 되도록 많은 무기들.
체험 하이라이트: 미친X 널뛰듯 하는 사막의 날씨 체험하기, 한낮에 땡볕 아래 선탠하기, 어디론가 사라진 개들 찾아다니기, 오크족 뺨치게 못생긴 돌연변이 괴물들 만나기. 이 괴물들이 선사하는 시체 캠프파이어로 간단한 환영식을 거치면 이제 본격적인 축제로 넘어간다. 이 괴물들은 무식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게 특징이나, 한편으로는 엄청 빠르고 날렵해 밤낮으로 불침번을 서며 공격에 대비할 필요가 있음. 납치된 아기를 찾기 위해 돌연변이 부족마을로 가는 것은 옵션임. 그 과정에서 김장 무처럼 댕강댕강 잘린 시체더미 속을 뒹구는 것이 진정한 하이라이트! 혹시 이 정도로도 헤모글로빈 섭취가 부족하다 생각되는 사람? 그렇다면 <힐스 해브 아이스> 2편으로 넘어갈 것.
주의사항: 어떻게 이 괴물들이 돌연변이가 됐을까, 정말 핵실험 때문일까, 깊게 파고들 필요 없다. 내장까지 깨끗이 발라가는 식인 퍼포먼스를 즐기면 그만이지.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생지옥으로 가는 필수 코스, 텍사스
여행지: 조지 부시의 고향이자 호러 여행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텍사스주. 그중에서도 미국 범죄사에 한획을 그은 연쇄살인사건의 배경, 트래비스 카운티의 작은 마을.
동행: 남자 둘, 여자 둘. 여름휴가 떠나기에 딱 좋은 적정 인원. 가족 단위보다 젊은 또래친구들끼리 떠날 것을 권장함. 게다가 시간적 여유가 없는 빡빡한 일정이기 때문에, 체력 좋은 동행자들을 찾는 게 현명할 것이다.
준비물: 잘 굴러가는 자동차 한대, 가뿐한 복장, 전기톱 소리에 둔감해지기 위한 귀마개, 타인의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넓은 오지랖, 급박한 상황에서 별 도움 안 되는 알량한 도덕심, 일단 위험이 닥쳤다 하면 36계 줄행랑을 칠 수 있는 달리기 실력 등등.
체험 하이라이트: 뉴스릴 시청을 통해 텍사스 연쇄살인사건 복습하기, 한여름에 에어컨 고장난 차에 시체 싣고 드라이브하기, 불친절하고 기분 나쁜 주유소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주유소는 호러 패키지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 전기톱과 갈고리 공장 견학하기, 텍사스 살인마 생가 방문하기, 도살장에서 텍사스 살인마와 숨바꼭질하기. 그 와중에 시체 발견 신고를 하기 위해 보안관을 찾아다니다가, 간신히 만난 보안관한테 단체기합 받기. 여기서 소개한 패키지는 2003년 마커스 니스펠 감독의 리메이크 버전이며, 텍사스의 공포를 집중적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토브 후퍼의 원작부터 찾아보길 강추!
주의사항: 텍사스주에 대한 막연한 공포증 배가. 덩달아 조지 부시에 대한 반감도 높아질 가능성 다분함. 시종일관 윙윙거리는 전기톱 소리에 일시적인 청각장애 현상과 한동안 악몽에 시달릴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함.
<블레어 윗치>
저주의 진실을 확인하는 기록여행
여행지: 메릴랜드주 버킷스빌 마을. 버킷스빌의 옛 지명은 ‘블레어’였다. 이곳에는 200여년 동안 블랙힐 숲속에서 어린이가 대량학살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진실은 확인된 바 없지만, 마을 사람들은 문제의 블랙힐 숲 쪽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동행: 호기심 많은 영화학도. 남자 둘, 여자 하나. 애정관계가 얽히지 않은 순수한 동료관계.
준비물: 다큐멘터리 취재의 목적에 맞게 카메라와 녹음기, 메모지는 필수. <숲에서 살아남는 법>이란 제목의 실용서적, 고열랑 식품, 텐트와 나침반, 지도 그 밖의 야영장비.
체험 하이라이트: 월드와이드웹의 세계에서 떠도는 소문 수집하기(www.blairwitch.com), 떠나기 전 함께 장을 보며 결의 다지기, 마을 입구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잠시 묵념, 마을 사람들 만나 ‘블레어 마녀’에 관한 전설 취재, 돌무덤 사이에 텐트 치고 하룻밤 보내기, 배설의 욕구를 해소하는 친구 몰카 찍기, 기아와 추위에 떨며 해 뜨기만을 기다리기, 이상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공포로 인한 팀의 분열 경험, 욕하기, 소리 지르기, 한 개비의 담배와 따뜻한 감자튀김을 그리워하며 계속 숲속을 헤매기, 무거운 짐 지고 외나무다리 건너기, 마지막 셀카 찍기.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오두막집에서 저주의 실체 확인하기.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에 떨며 마음고생 극심하게 하는 패키지.
주의사항: 현기증과 구토 증세,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에 시달릴 수 있음. 결정적으로 유사 모조품 <블레어 윗치 패러디>와 헷갈리지 말 것.
<데드 캠프>
죽거나, 혹은 죽고 싶도록 나쁘거나
여행지: 웨스트버지니아, 그린브리어 백카운티. 정체되는 고속도로를 피해 남들 모르는 길로 조금 더 빨리 가볼까 잔머리를 굴렸던 일당.
동행: 세 시간 뒤에 있을 취업 인터뷰를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크리스는 사고로 도로가 막히자, 차를 돌려 웨스트버지니아 도로로 접어든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캠핑을 가는 중이던 제시, 칼리와 그 남자친구 스캇, 에반과 그 여자친구 프랑수아는 타이어가 펑크나는 바람에 버지니아 숲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산길을 운전하던 크리스는 커브를 돌다가 이들의 차량을 들이받고, 크리스와 제시 일행은 같이 전화를 찾아 나선다. 같이 살게 될지 같이 죽게 될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며느리도 모른다만.
준비물: 튼튼한 다리도 중요하지만 펑크 몇번 나도 갈 길 계속 갈 수 있는 여분의 타이어가 있으면 더욱 좋다. 총이 있으면 좋겠지만, 자고로 총 있다고 무서워하는 살인마도 없더라. 막혀도, 고속도로가 안전하다는 점을 명심하라.
체험 하이라이트: 산장을 발견한 일행은 그 안이 무시무시한 사냥 무기들과 사냥 전리품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 겁에 질린다. 차에 남아 있던 에반과 프랑수아는 산장의 주인인 세 존재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친구들이 죽는 것도 무서워 죽을 일인데, 그 친구들이 죽은 뒤 어떤 꼴이 되는지, 누구의 뱃속을 두둑하게 채워주는지 등을 보고 있으면 더욱 끔찍하다. 살아 나간들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 자명하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차가 아무리 막혀도 고속도로를 이용하라. 테이블 밑에 숨어서 괴물과 숨바꼭질하기는 이 코스의 백미.
주의사항: 멀찍이서 이상하다 싶으면 절대 가까이가지 말 것. 자고로 공포영화란, 호기심있는 청춘을 위한 진혼곡 아니던가. 궁금증이 고양이를 죽인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개라지만 당신에게는 하나뿐이다. 제발 정신 차리고 호기심은 꾹 억눌러다오.
<더 로드>
서양의 저승사자를 만나러 가는 뱅글뱅글 길
여행지: 네브래스카주 교외의 마르콧 로드.
동행: 가족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대화가 적은 사람들이 있을까. <더 로드>의 동행은 바로 그런 가족이다. 알고 보면 어느 가족이나 콩가루 집안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명심할 것. 최근 들어 부쩍 말수가 줄어든 식구가 있다면 문제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준비물: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척들에게 줄 선물을 차 트렁크에 싣고 갈 것. 특히나 미국처럼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나라에서 총기 관련 취미가 있는 친척이 있다면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귀신을 총으로 백번 쏜들 죽겠느냐는 것. 까딱 잘못하면 분노한 다른 식구 손에 총이 들리는 바람에 피바다 되는 수가 있다. 차에 기름은 가득 채울 것. 여분의 타이어도 필수다.
체험 하이라이트: 길거리에 흰옷을 입은 여인이 아이를 안고 서 있다. 이때 아이 얼굴 먼저 확인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 로드>의 가족은 이 여인을 차에 태우는 바람에 공포의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길가에 수상쩍은 유모차가 등장하는 경우, 차를 세워서 그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들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차를 세울 때마다 한명씩 죽는다. 특히나, 식구가 사라지고 나면 까만 차가 등장하는 대목이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인데, 그 차에는 조금 전에 실종된 식구가 타고 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식구는 시체로 발견된다. 어둠 속에서 불 켰는데 상냥하게 불 꺼주는 귀신 만나기는 강추.
주의사항: 다만, 외딴길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며 말싸움을 시작하는 경우, 도망갈 곳이 마땅찮음을 염두에 둘 것. 나중에 집에 오면 차 안에서 했던 말을 후회하게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죠스> & <플래시드>
물은 깊고 두려움도 깊어라
여행지: 뉴잉글랜드의 작은 해안 피서지 애미티. 아주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로, 우정이란 뜻을 가진 이 마을은 전형적인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동행: 룰루랄라 튜브를 준비해 바다를 향해 떠나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떠날 수 있다. 이를테면 캠프파이어를 하는 젊은이들. 혈기왕성한 나머지 신이 나서 옷을 벗고 밤바다를 향해 뛰어들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공포영화 주인공.
준비물: 당신 몸만 있으면 된다. 뉴잉글랜드의 물에는 마가 끼었는지 이상한 존재들이 서식하고 있다. 조스도 있고 <플래시드>의 괴이한 생명체도 있다. 이런 존재들에 있어 흥미로운 것은 당신 몸뿐. 당신이 뭘 준비해 간들 대세에는 지장없다. 훗.
체험 하이라이트: 점쟁이가 나오는 공포영화나 TV 재연극장을 보면 이런 대사가 종종 나온다. “물을 조심해.” 한국영화에서는 물가에 서식하는 물귀신들 때문에 그런 경고문구가 등장하지만, 미국에선 조금 다르다. 물에는 알 수 없는 생물이 살고 있다. 그러니 체험하고 싶다면 상어가 있다는 곳에서 피가 흐르는 고깃덩어리 흔들기에 도전해보자. 당신은 인기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남아에서 하는 악어쇼같이 신체의 일부를 상어의 입에 넣는 것만은, 자제해주었으면 한다.
주의사항: 물을 조심하라는 말만큼 효과적인 경고문구는 없다. 사실, 당신이 해수욕을 하겠다고 물에 뛰어들었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무섭지?) 다만 스릴의 정도로 치면 롤러코스터 백만스물하나를 탄 것 같은 효험이 있다는 것.
<지퍼스 크리퍼스>
달리는 차 위에 나는 괴물 있다
여행지: 플로리다주의 광활한 도로. 플로리다주에서 촬영했으나 사실 미국에 뻗어 있는 많은 도로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도 됨.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려는 여행 계획을 가진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
동행: 1편에서처럼 오누이가 같이 가도 좋고, 2편에서처럼 학교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좋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괴물 관점에서 보면).
준비물: 달력. 날이면 날마다 오는 괴물이 아니다. <지퍼스 크리퍼스> 시리즈의 주인공은 23년마다 나타나 23일 동안 살육하는 괴물 같은 존재. 그러니 이 날아다니는 프레디 같은 악당을 만나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번이 23년에 한번 돌아오는 그해인지, 23일에 해당하는 날이 언제 시작하는지 미리 연구해볼 것을 권한다. 퇴치를 원한다면 꼬챙이 같은 것도 도움이 되겠다. 중요한 건 상대방은 날아다닌다는 거. 웬만한 도구로는 무찌를 수 없다.
체험 하이라이트: <지퍼스 크리퍼스>는 일종의 로드액션무비다. 스멀거리는 공포감도 맛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길바닥에서 날아다니는 괴존재와 목숨 건 사투를 벌이는 액션장면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매력. 하지만 동행이 괴존재의 발에 낚여 날아가는 모습을 수수방관하며 고통스러워하게 될 수도 있다. 이건 사파리가 아니거든. 목청이 좋다면 수시로 소리 지르기, 동행인 구하러 갔다가 목숨을 건 위험에 빠지기 등을 체험해볼 수 있는 코스다.
주의사항: 인적 드문 시골길을 차로 달리고 있다. 그런데 트럭을 탄 누군가가 교회 건물에 시체를 버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도망가기다. 제발 부탁인데 명심하라. 당신의 선의는 당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모호한 시도는 포기하도록 하자. 친구나 오빠가 죽은 모습을 보게 되는 수가 있다. 더 끔찍하게는 당신의 생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