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PPP시상장식에서의 수상자들. 왼쪽부터 장밍, 송일곤, 박광수, 클라라 로, 무라모토 다이시, 로우 예, 유 릭 와이.
‘부산영화제 패밀리'라 불리우는 아시아 감독들이 있다. 이들이 어떻게 부산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했고, 김지석 프로그래머에게 약간의 읽을 거리를 부탁했다. 그러나 김 프로그래머가 보내온 사연들에는 소소한 뒷 이야기만이 담겨 있진 않았다. 부산영화제 패밀리가 결성되기까지의 인연의 궤적을 따르다 보면, 부산영화제가 지난 9년 동안 새롭게 그린 아시아 영화의 지형도가 떠오를 것이다.
지금은 뉴커런츠 부문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인기있는 부문이 되었지만 초창기에는 관객의 주관심이 역시 지명도 있는 감독들에게 쏠려 있었다. 그중에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차이밍량처럼 국내에도 작품이 소개되어 널리 알려진 감독도 있었지만, 이름만 알려진 감독도 꽤 많았다. 특히, 후자는 프로그래머의 입장에서 관객에게 소개해주는 기쁨이 배가되는 경우였다.
먼저, 차이밍량과 이강생. 차이밍량은 감독 중 부산국제영화제 최다 참가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전 작품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되었고, 초청작이 없을 때는 PPP에라도 참가하는 단골손님이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2001년 제6회 때 부산을 처음 방문했다. 비록 뒤늦은 방문이었지만, 김동호 집행위원장과 너무나 다정한 술친구가 되었고 지금은 사이먼 필드 전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평론가 피터 반 뷰어렌,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등과 함께 ‘타이거클럽’의 멤버가 되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2회 최고의 스타였다. 당시 초청작 <하나비>는 2회 상영분이 모두 매진되었고, 급히 야외상영을 마련하였지만 그마저도 모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관객과의 대화를 할 때마다 ‘한국 축구, 한번만 일본에 져주세요’라고 애교 섞인 부탁을 하곤 하였던 그는 냉면집에서 육수에 밥 말아먹고 싶다며 필자를 웃기곤 하였다. 당시 영화제 전까지만 해도 감독으로서의 기타노 다케시를 아는 국내 관객은 별로 없었지만, 이후 그는 관객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해외에서 다케시를 감독으로 떠받드는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 다케시는 코미디언으로 더 유명하기 때문이다.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흐말바프 일가의 핸드프린팅 장면. 온 가족이 핸드프린팅을 한 예는 부산영화제가 계속되어도 전무후무할 이벤트일 듯.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가 가장 사랑한 감독은 역시 모흐센 마흐말바프이다. 1997년 <가베>를 시작으로, 1998년 제3회의 개막작이었던 <고요>, 그리고 5회 때 온 가족의 영화를 소개하였던 ‘마흐말바프 가족 특별전’, 그해 뉴커런츠상을 수상한 아내 마르지예 메쉬키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 등 마흐말바프가의 영화들은 언제나 환영받았고,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영화재건과 어린이 교육운동에 헌신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들 감독들의 공통점은 ‘관객과의 대화’에 늘 진지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작품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과 영화관을 드러내고 진지한 삶의 대화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특히, 영화의 발전과정을 민주주의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보는 마흐말바프의 영화관은 영화에 대한 대중의 기존 인식을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관객이 그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역시 그의 인품이다. 아프가니스탄 촬영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촬영을 접고 제작비 모두를 구호에 썼는가 하면,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가족의 의견을 취합하여 결정하는 열린 가장의 모습 등 그의 생활상 하나하나가 감동을 주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란 정부의 미움을 받아 타지키스탄, 프랑스 등 외국을 떠돌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어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었거나, 각광받기 시작한 감독들 또한 무수히 많다. 이들의 활약상은 아시아영화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을 좀더 분명하게 다져주는 영향을 끼쳤다. 장밍, 박기용, 논지 니미부트르, 자파르 파나히, 키엔체 노르부, 펜엑 라타나루앙, 프루트 챈, 지아장커, 리리 리자,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창동, 무랄리 나이르, 유키사다 이사오, 청원탕 등 그들은 이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감독들이다. 또한, 이들의 활약상은 지난 10년간의 아시아영화의 발전상 그 자체이다. 이들 대부분은 부산과도 지속적인 인연을 쌓아나가고 있다. 장밍은 <주말음모>, 자파르 파나히는 <순환>, 프루트 챈은 <리틀 청>, 지아장커는 <플랫폼>, 리리 리자는 <풍운아 기에>, 청원탕은 <블루 차차>, 펜엑 라타나루앙은 <몬락 트랜지스터>, 이창동 감독은 <오아시스> 등 PPP를 통해 차기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장밍이나 지아장커 등 중국의 독립영화 감독들은 폐쇄적인 중국 정부당국의 영화정책 때문에 겪었던 어려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곤 하였다. 단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딱 한번 부산을 방문하였던 키엔체 노르부는 가장 이색적인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영화제작이 거의 전무한 부탄 출신인 점도 그렇거니와, 저명한 고승이면서 감독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지난 2003년 <여행자와 마법사>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그와 저녁식사를 하였던 필자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육식을 하는 다른 게스트를 위하여 단 한점의 고기만을 접시에 올려놓은 채 이야기를 나누던 그의 모습에서 고승의 진면목을 보았던 것이다. 또한, “나는 집이 없습니다”라면서 이메일 주소만 적혀 있는 명함을 내놓던 그의 모습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자파르 파나히에게 부산은 영감의 장소였다. 1회 때 부산을 찾은 바 있는 그는 차기작 <거울>의 모티브를 PIFF 광장에서 얻었노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리고, 1998년 이란의 파지르영화제에 참가하였다가 다른 영화제 관계자들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술이 몇잔 돌자 그는 “부산영화제가 최고야”라며 진한 애정표현을 하기도 하였다(금주 국가인 이란에서 어떻게 술잔을 돌렸는지는 비밀). 이렇게 신인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감독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 가족과 같은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다. 물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게스트와 늘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부산국제영화제가 불편해했던 감독들에 대해 쓰고 싶기는 하다(물론 익명으로).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초청 게스트 중에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힘들게 했던 이도 꽤 있었다.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더 흥미롭겠지만, 그건 내가 은퇴하고 난 뒤에 쓸 예정이다. “사랑은 드러내고 미움은 담아주자.” 부산국제영화제의 모토 중 하나이다.
PIFF Family
Ming-Liang Tsai has recorded the most films participated in PIFF. All of his films were screened at PIFF and when none his films were invited, he even had his films shown in PPP. Hsiao Hsien Hou first visited Pusan on the 6th PIFF held in 2001. Although it was a late visit, he became good friends with the festival director, Kim Dong-ho, and now is a member of ‘Tiger Club’ with Simon Field, the formal festival director of Rotterdam Film Festival, Peter Van Buren the critic, and Thierry Fremaux the Cannes Film Festival director. Gitano Takesi was the star of the 2nd PIFF. Tickets for his invited film Hanabi were completely sold out and although outside screening was temporarily set up, they too were sold out quickly. “Please let the Japanese win this time”. He would charm the audience with this phrase. Although Gitano Takesi was not known amongst the domestic audience, he left a strong impression on them after the film festival.
As expected, the most beloved one was Mohsen Makhmalbaf. Since Gabbeh of ’97, films of the Makhmalbaf family such as Silence, the opening film the 3rd Piff in ’98, ‘Makhmalbaf Family Films’ section on the 5th, which introduced the whole family movie collection, and The day I became a woman of Mrs. Makhmalbaf, which won the New Currents on the same year, have always been welcomed by audiences and has thrown fresh challenges to them. His devotions in the Afghan Children Education Movement (ACEM) and the rehabilitation of Afgan films always touched the heart of the audience. There are also many directors who were newly introduced or focused at PIFF. They let PIFF discover and support Asian films, which is the original identity of PIFF. Ming Zhang, Gi-young Park, Nonzee Nimibutra, Jafar Panahi, Khyentse Norbu, Pen-Ek Ratanaruang, Fruit Chan, Zhang Ke Jia, Riri Riza, Koreeda Hirokazu, Chang-dong Lee, Murali Nair, Isao Yukisada, Wen Tang Cheng: Now they are under the global spotlight, and their careers are the Asian film history of last 10 years. They are constantly keeping good relationship with PIFF. Ming Zhang’s Weekend Plot, Jafar Panahi’s The Circle, Fruit Chan’s Little Cheung, Zhang Ke Jia’s Platform, Riri Riza’s Gie, Wen Tang Cheng’s Blue Cha Cha, Pen-Ek Ratanaruang’s Monrak Transistor, Chang-dong Lee’s Oasis; They could have produced their following films through PPP.
Especially, the Chinese indie film directors such as Zhang Ming and Zhang Ke Jia, who had difficulties dealing with the close-minded film policy of the Chinese government, were encouraged by PIFF. Khyentse Norbu, who has visited Pusan once, was one of the most peculiar directors in that he is from Bhutan, a country where film was barely produced, and a well-known high priest.
For Jafar Panahi, Pusan was an inspiring place. He who visited the 1st PIFF had mentioned once at an interview that he was inspired to create his following film, The Mirror, at PIFF plaza. Often, those directors who have had relations with PIFF early in their careers find PIFF cozy.
As a matter of fact, not all the guests were so friendly to PIFF. There may be a chance to introduce some anonymous guests who were troublesome. For the readers, this will be more interesting, however, I plan to write about them after I retire. (Readers who expect for such episodes, wait for me to retire.) “Show Love, Embrace Hate”, a motto of PI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