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를 좋아하고, 20대 전반을 택시 드라이버, 족발 배달원, 막노동꾼, 여관 시다, 핫도그장수를 포함한 각종 직업에 몸담고 있다가 목사가 되려고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을 9년 만에 졸업해선 영화의 ‘영’자도 모른 채 영화판에 뛰어든 남자가 있다. <나도 아내가…>의 늦깎이 조감독 박성범(33)이 그 주인공. 취재 요청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쑥스럼을 타던 그가 조심스레 들려주는 인생 얘기 앞에서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주로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택했다는 그의 이력이란 도대체가 편한 일, 고상한 일만 찾는 우리에겐 그저 ‘딴나라’ 일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중 택시 드라이버는 얼핏 듣기에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영화판에 들어온 사연 역시 드라마틱하긴 매한가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에서 착실히 목사 수업을 받고 있겠거니 생각하던 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금세 대학생활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나마 정을 붙인 연극동아리에서 연출을 맡아 의욕적인 활동을 펴기도 하나 그것도 잠시뿐, 얼마 못 가 학교 밖을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생활전선에 몸을 담았고, 스무개가 넘는 일자리를 전전하며 나름의 인생 공부에 심취한다.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공부에 전혀 진전이 없는 그를 식구들은 타박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의 마음은 애초의 목표와는 멀어진 상태. 9년간의 지리한 대학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나오자 막막함이 앞섰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그를 반길 데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왜 그때 영화가 떠올랐는진 아직까지 미스터리예요. 그냥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주위의 권유로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씨네21>에서 주최하는 시나리오 공모전 소식을 듣는다. 남은 기간은 한달 남짓, 입문서만 달랑 들고 써내려간 시나리오는 <와일드>라는 제목만큼이나 거친 모습으로 잡지사의 문을 두드리고, 다른 응모 작품들과 함께 제작사에 넘겨져 마침 우노필름 이사로 있던 차승재의 손에 이르게 된다. 우연이었을까 아님 의도였을까. 그 당시 차승재는 박성범의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본선작으로 올릴 것을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서랍 속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한편 잡지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박성범은 실망감을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통. 차승재였다. 실수로 그의 시나리오가 누락된 점에 대해 사과하면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해 온 것이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무실로 찾아간 날, 차승재는 장문일을 그에게 소개했고, 곧 둘은 <행복한 장의사>에서 감독과 연출부로 만나게 된다. 연출부일만 한 건 아니다.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관방 남자’로 등장하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나도 아내가…>로 조감독이 된다.
생각해보면 조감독이라는 자리만큼 사람 시중 많이 드는 자리가 없다. 늘 배우들 스케줄 관리에 바쁘고 스탭들과 감독의 중간에 서서 모진 소리도 들어야 하지만 분명한 건 감독을 보위하고 다잡아주는 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 감독이 요구하는 게 때로 비합리적일지라도 일단 들어주고 보는 건 당시엔 이해가 안 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가 옳은 판단을 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현상된 필름을 보며 “결국은 그가 주장했던 방식이 맞는 거였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그, 그런 작은 믿음들이 촬영장에서 자신과 주위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의 영화를 찍고 싶단다. 시나리오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첫 작품이었던 <와일드>가 될 것이다. 이제 막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무사히 첫발을 뗀 소감을 묻는 말에 그는 일부러 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제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simssisi@dreamx.net·사진 손홍주기자lightson@hani.co.kr
박성범 프로필
1968년생
서울신학대 신학과 90학번
99년 <행복한 장의사> 연출부 및 배우
2000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조감독
2001년 단편영화 제작 예정, 제목 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