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든 컬트
영화사 100년을 결산하는 걸작 100선은 물론, 이런저런 톱텐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카사블랑카>(1942). 전쟁이라는 위기상황 속에 갇힌 인간들의 선과 악이 교차하는 가운데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랑이야기가 정점을 이루는 이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컬트영화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 불후의 명작이 크고 작은 우연의 아귀가 절묘하게 맞아들면서 빚어진 모자이크라는 사실을 아는지?
<카사블랑카>는 일단 대타들의 행진이다. 여주인공 일자 룬트 역에는 원래 프랑스 여배우 미셸 모르강이 캐스팅됐다. 그러나 자신의 주가를 과대평가한 모르강은 출연료 5만5천달러를 제작사 워너브러더스에 요구했다. 당시로는 워낙 엄청난 액수라 제작자 할 월리스가 골머리를 앓던 중, 스웨덴 여배우 한명이 수줍게 찾아왔으니 이름하여 잉그리드 버그먼. 헤밍웨이 원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여주인공 캐스팅에서 탈락한 버그먼은 모르강이 요구한 출연료의 반도 안 되는 2만5천달러로 만족했다.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는 통에 악명을 날리던 마이클 커티스 감독도 워너브러더스로서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군입대를 결정하는 바람에 까탈스런 커티스를 대타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험프리 보가트, 즉 릭 블레인의 술집에서 가끔 ‘그 노래’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샘은 엘라로 불릴 뻔했다. 그러나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가 빡빡한 스케줄로 출연을 포기, 피아노 건반도 두드릴 줄 몰랐던 둘리 윌슨이 ‘그 노래’를 연주하게 됐다. 정말 가슴 섬뜩한 얘기는 릭 블레인 역이 로널드 레이건에게 돌아갈 뻔했다는 사실. 레이건 입장에서야 평생 통탄했을 일이지만, 험프리 보가트 아닌 레이건의 릭을 봐야 할 고역을 면한 관객으로서야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레이건이 릭을 연기했다면, 덜렁 큰 키로 유명했던 버그먼과 눈높이를 맞추느라 보가트가 사과궤짝에 올라갈 일은 없었겠지만….
작가 7명이 참가했던 시나리오 작업도 내내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툭 하면 대본이 바뀌기 일쑤라 잉그리드 버그먼은 자기가 남편과 애인 중 누구를 선택하게 될지 끝까지 감도 못 잡았다고 한다. 작가들의 변덕에 질린 보가트는 버그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를 자기 맘 내키는 대로 뱉어버렸고. 마지막 공항장면에서 부패경찰 루이스에게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보가트의 그 유명한 대사는 한참 뒤에 덧칠된 것이다. 촬영이 끝나고 3주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이 말이 제작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바람에. 보가트와 버그먼의 사랑의 주제곡 가 영 맘에 안 들던 작곡가 막스 스타이너도 그 참에 러브신을 재촬영하고 싶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배역을 다시 따낸 버그먼이 머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경로로 조금씩 새어나왔던 <카사블랑카>의 제작일화들을 묶어 총체적 전말을 밝힌 것은 미국 영화저널리스트 알리안 하메즈의 저서 <카사블랑카, 과연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나?>이다. 하메즈는 자료수집을 위해 아예 워너브러더스 자료보관실에 눌러 살면서 먼지가 켜켜이 앉은 제작노트, 영수증, 조그마한 메모 쪽지까지 빠짐없이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자료들로 퍼즐을 엮어가며 이빠진 부분들은 아직 살아 있는 <카사블랑카> 제작 일원들의 인터뷰로 보충했다.
하메즈는 <카사블랑카>의 성공이 제작 당시의 정치상황, 즉 2차대전과 밀접히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처음엔 전쟁이 불행수로 작용하는 듯 보였다.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미국이 참전을 선포한 다음날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는데, 폭격 위험으로 할리우드에 야외촬영 금지령이 내려 커티스 감독은 마분지로 공항 세트를 만들어야 했다. 그 조잡한 꼴을 숨기려니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 안개라곤 절대 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안개제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물자절약을 위해 세트를 재활용하느라 <사막의 노래>에 쓰인 세트의 상점 간판들을 불어로 바꿔 달았는데, <카사블랑카>의 프렌치 스트리트 분위기가 그나마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앵무새 두 마리의 우정출연 덕분이다.
이토록 우울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은 우연한 계기 덕이었다. 촬영 후반 작업에 들어가는 시점에 연합군은 북아프리카로 진격, 곧바로 카사블랑카를 점령했다. 워너브러더스의 신작 제목이 하필이면 <카사블랑카>라는 사실에 다른 제작사들은 배가 아파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우연의 일치에 고무된 제작자 할 월리스는 연합군의 카사블랑카 점령장면을 새로 끼워넣고자 했지만, 커티스 감독의 유명한 고집 덕택에 3류 전쟁영화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던 <카사블랑카>는 불후의 명작이라는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1943년 1월, 작품이 개봉된 첫주, 고맙게도 처칠과 루스벨트가 카사블랑카에서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카사블랑카>의 행운은 절정을 이룬다. 전쟁이 영화를 팔아주니 더 좋은 선전효과를 어디서 바랄 것인가!
지난 4월 초 출간된 하메즈 저서의 독일판 추천사를 쓴 베를린 영화박물관장 게로 간더트는 유대계 독일영화인들의 운명이 <카사블랑카>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말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치 군인들 역할도, 나치를 피해 미국행 비자를 학수고대하는 망명객들 역할도, 실제로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계 독일배우들이 열연했기 때문이다. 버그먼의 남편을 못 잡아 안달하는 독일장교 슈트라서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 출연했던 독일영화계의 스타 콘라트 바이트다. <카사블랑카> 촬영장에 출근하다시피했던 빌리 와일더 감독도 “독일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 꼭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베를린=진화영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