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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주의의 새 지평선을 향하여
2001-01-05

일본의 새로운 영화제 ‘도쿄 필름엑스’

12월16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쇼핑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긴자 거리에서 새로운 영화제 도쿄 필름엑스(TOKYO FILMeX)가 첫문을 열었다. ‘아시아 신작가주의 영화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제는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아시아영화를 엄선해 좀더 빨리 일본 관객에게 소개하자는 취지로 올해부터 시작됐다. 사전에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주최하는 영화제’라는 보도가 일부에서 흘러나왔지만 기타노 감독은 영화제의 운영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 그가 소속돼 있는 오피스 기타노와 그 자회사인 T-MARK가 영화제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과, 기타노 감독 자신이 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영화제 디렉터인 이치야마 쇼조가 고른 ‘작가주의적’ 상영작품은 경쟁부문과 특별초대작품으로 나뉘어 있다. 24일까지 진행되는 이 영화제의 경쟁부문에는 6개국에서 11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으며, 이중 최우수작품상과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이 선정된다.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감독에게는 상금이 아니라 코닥주식회사로부터 100만엔 상당의 필름이 다음 작품 촬영용으로 주어진다는 점도 영화작가를 소중히 여기는 영화제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멕시코 영화감독인 아르투로 립스테인이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고 헝가리감독 타르 벨라, 이란감독 자파르 파나히, 부산영화제 아시아영화부문 프로그래머인 김지석, 일본 피아필름 페스티벌 디렉터인 아라키 게이코 등이 심사위원으로 선정됐다.

특별초대작품으로는 5개국 6개 작품과 합작영화 6편 등 총 12편이 상영된다. 이외에 이번 영화제에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던 70년대 이란감독 소흐라브 샤히드 사레스의 작품들과 젊은 감독들이 만든 신작 비디오도 상영한다. 한국영화로는 경쟁부문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특별초대작품으로 <반칙왕>, 비디오 프로그램으로 <너무 많이 본 사나이>가 출품되었다. <죽거나…>와 <반칙왕>은 둘 다 흥행작이지만, 동시에 작가로서 감독의 시점이 확실히 나타난 작품이기 때문에 선택됐다. “작가성이 강하다는 것은 아트 계열이고 상업성이 없는 작품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이들 작품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이치야마는 말한다.

현재 일본에서는 감독의 작가성이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도쿄에서만 약 30개의 미니 시어터(일반적으로 1관만으로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을 가리킴)가 있지만 순수한 아트계 작품의 흥행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도쿄 필름엑스는 이런 흐름을 거스르고, 작가라는 점을 내세워 다시 한번 관심을 모아보자는, 이치야마를 중심으로 한 스탭들의 강한 의지로 탄생한 영화제다. 영화업계도 이 영화제의 탄생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 영화 관계자는 “이치야마의 작품 선정능력은 아주 신뢰할 만하므로 이대로 몇년간 계속해 나가면 분명 훌륭한 영화제가 될 것이다. 언론도 비평가도 응원해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예매 당시에는 관금붕이 감독하고 일본배우 오사와 다카오와 모모이 가오리가 출연한 일본-홍콩 합작영화 <섬 이야기>(The Island Tale)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중국어권 작품이 그뒤를 이었고, 이란영화, 한국영화 순으로 관심이 몰렸다. 상영 첫날인 17일에는 상영시간 1시간 전부터 열성 팬들이 상영장인 르 테아코르 긴자 극장에 모여들어 찬바람 속에서도 줄지어 개막작품인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의 <칠판>의 개장을 기다렸다.

심포지엄에서 영화제로

영화제는 12월16일에 행해진 업계, 언론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심포지엄으로 시작됐다. 도쿄 다이이치호텔에서 열린 심포지엄은 2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아시아영화 전문가이며 장선우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인 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1990년대부터 2000년에 걸친 동아시아영화의 흐름을 돌아보았다. 레인즈는 타이영화계의 부활과 한국영화계의 활황 등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한국사회 자체의 역동성에 힘입어, 영화문화가 커나가고 있다. 메이저영화가 성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트계 작품, 단편,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뛰어난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의 경우 정부의 검열이 해외투자자에게 리스크가 되고 있으며 재능있는 감독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홍콩은 메이저 작품이 줄고 독립작품이 늘고 있다. 또 대만은 큰 제작사가 없어지고 감독이 스스로 자금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제작되는 작품의 질은 높다”고 설명했다. 타이나 베트남도 대만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 그의 이야기.

2부에서는 ‘아시아에서의 공동제작에 관해’라는 주제로 세명의 패널리스트가 의견을 교환했다. 먼저 부산국제영화제 PPP 디렉터인 정태성씨가 올해와 지난해의 PPP 성과를 보고했다. 이어 <섬 이야기>와 <하나 그리고 둘>의 제작을 담당한 쓰케다 나카오는 “자국 내에서는 좀처럼 자금이 모이지 않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협력해서 ‘메이드 인 아시아’ 작품을 만들어 세계에 선보이고 싶었다”며 공동제작을 하게 된 경위를 말했다. 쓰케다는 또한 아시아영화를 보고 관심을 가진다 해도 감독 이름이나 각본가의 이름만으로는 망설이게 되는 일이 많으므로 해외에서 배급권을 팔기 위해서 영화제에 출품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 한번 평가받으면 다음 작품은 반드시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 상영 뒤에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고, 회장에 비치돼 있는 데일리뉴스를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게 하는 등 관객과 의견을 나누는 장을 만드는 데 특히 신경을 썼기 때문에 상영이 계속됨에 따라 관객의 반응도 점점 좋아졌다. 18일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상영 뒤 예정돼 있던 관객과의 대화가 공항에서 예정된 장소를 향하던 류승완 감독이 교통체증으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연기되는 등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해프닝도 있었다.

“영화제작, 국경을 넘어서"...디렉터 이치야마 쇼조 인터뷰

일본에서 가장 젊은 영화제인 도쿄 필름엑스 회장에서는 그리 많지도 않은 스탭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디렉터인 이치야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포지엄이나 관객과의 대화에서 사회를 보는 것뿐 아니라, 매일 발행되는 데일리뉴스를 위한 인터뷰도 혼자서 해내는 ‘너무나 바쁜’ 이치야마를 회장 로비 한구석에서 만나보았다.

이치야마는 원래는 쇼치쿠주식회사 프로듀서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데뷔작인 <그 남자 흉포하다>나 다케나카 나오토 감독의 데뷔작 <무능한 인간>,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호남호녀> 등의 작업에 참여했다. 이와 함께 1992부터 99년까지 도쿄국제영화제의 ‘아시아 수작영화주간’(현재 ‘시네마 프리즘’) 작품선정을 담당했고, 아시아를 중심으로 수많은 영화작가를 일본에 소개했다. 98년 쇼치쿠를 퇴사한 뒤 오피스 기타노의 자회사인 주식회사 T-MARK에 소속해 있다.

-영화제는 어떻게 열게 됐나.

=일본에는 외국의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가 적기 때문에 이전부터 오피스 기타노나 잘 아는 배급사 사람들과 함께 도쿄국제영화제와 차별화된 작가성이 강한 작품을 모은 영화제를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 지난해에 사정이 있어서 ‘시네마 프리즘’ 일을 그만뒀기 때문에 새로운 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해 실제로 활동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올해 4월경에 자금면에서 전망이 보이면서 개최가 정해졌다.

-작품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작가의 시점이 확실히 드러나는 영화다. 작가주의를 명확하게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도쿄국제영화제와는 다른 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의 전망은 어떨 것이라 생각하나.

=영화제는 관객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영화제작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공헌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정된 마켓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재들간의 교류라는 의미에서도 앞으로는 국경을 넘는 영화제작이 증가할 것이라 본다. 일본 국내에도 공동제작을 해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장소를 영화제는 제공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는가.

=최근 4, 5년 사이에 크게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대교체를 확실히 느낄 수 있고, 지금까지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감각을 가진 작품이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일본, 홍콩,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공통된 경향이 나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도 대히트한 <쉬리>를 보아도, 한국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이나 액션에서 일본이나 홍콩 작품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므로 최근의 한국작품들은 일본 관객도 받아들이기 쉽다고 생각한다. 물론 감각이 바뀐 것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감독이 몇명이나 나왔다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도쿄=사토 유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