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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스크린은 할리우드에 푹 빠졌다
2001-05-17

칸영화제가 중반을 넘어선 15일, 경쟁작들이 전세계 기자와 비평가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뤼미에르 극장에서 모처럼 환호가 터져나왔다. 미국의 배우 겸 감독인 숀 펜이 연출한 <서약>이 상영된 직후였다.

사건 해결에 다가설수록 역설적으로 궁지에 몰려가는, 은퇴한 형사의 이야기다. 숀 펜은 스릴러 장르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한 인간의 처지를 세밀하게 포착해갔다. 잭 니콜슨의 걸출한 연기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우로 더 유명한 숀 펜까지 수작을 내놓으면서 미국영화들의 강세는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 개막작 <물랭루즈>가 호평과 혹평의 극단을 왔다갔다 하면서 화제를 낳더니, 드림웍스의 야심찬 애니메이션 <슈렉>과 코언 형제의 <거기에 없었던 남자>는 해외 언론들이 매기는 별점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엇비슷하게 받았다.

게다가 비경쟁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미국독립영화들의 주목도는 경쟁작 못지 않아서 상영 때마다 극장 앞은 인파로 가득 찼다. 아벨 페라라의 는 자신의 단골 소재인 범죄와 마약을 다루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화면과 함께 아웃사이더에 대한 애정을 이어갔고, 토드 솔론즈의 <스토리텔링>은 부조리한 가족과 개인이라는 화두를 파고들면서 위악스런 유머를 술술 풀어냈으며, 할 하틀리의 <노 서치 싱>은 영생의 괴로움을 가진 괴물과 돈키호테같은 처녀를 등장시켜 감독 특유의 삐딱한 상상력을 펼쳐보였다.

반면 `뉴웨이브(새로운 물결)'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기대를 모은 일본영화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고레에다 히로카주의 <디스턴스>는 옴진리교 사건을 소재로 삼아 처참하게 죽어간 광신도의 각기 다른 가족 4명의 고통스런 내면을 조용하게 응시했다. `주목할 만한 시선'에 선정된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아루쿠―히토> 등도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다만, 칸에서 대상을 두번 받은 이마무라 쇼헤이와, 2년 연속 경쟁에 오른 아오야마 신지의 작품이 상영을 기다리고 있어 아직 불씨를 남기고 있는 상태다.

칸은 올해 새로운 작가 발굴에 인색했지만, 데뷔작으로 경쟁에 오른 보스니아의 다니스 타노빅 감독이라는 보석을 찾아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가 벌인 내전에서 양쪽 군인 두명이 전선 한가운데에 기묘하게 고립되고, 이들 문제를 둘러싸고 유엔군과 세계의 언론이 직접 개입해 들어가는 과정을 진지하면서도 유머 넘치게 그렸다. 마치 `보스니아판 공동경비구역 JSA'같은 영화인데 특정 지역의 문제를 보편성으로 풀어가는 솜씨가 돋보였다. 짙은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달에 가린 해>를 빼놓을 수 없다. 아프카니스탄 국경 근처에서 굶주림과 지뢰로 수없이 죽어가는 충격적인 현장을 다큐멘터리적으로 엮어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마흐말바프는 해당 지역을 누비며 촬영하다 암살당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고 밝혔다.

인간의 광기와 폭력에 대한 질문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작품도 화제다. 오스트리아의 미카엘 하네케는 <피아노 교사>에서 어머니의 억압과 음악학교의 굴레에 갇혀 변태적인 마조히즘에 휩싸인 여자를, 프랑스의 세드릭 칸은 <로베르토 수코>에서 주류 세계의 질서에 대한 반감을 무자비한 연쇄살인으로 드러낸 실존 범죄자의 이야기를 `엽기적'으로 보여줬다.

칸/이성욱 기자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