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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소설이지만 픽션은 아닌, 김예솔비 평론가의 <가능한 사랑>
글 김예솔비 2026-10-21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여름 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영화를 찍는 예지(조여정)의 심정에 대해 말하는 상우(조인성)에게 예지는 이렇게 답한다. 예지는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는 걸까? 그러나 예지는 자신의 영화를 노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예지가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 한다는 말은 영화감독의 태도라기보다, 작품이 진정한 예술이 되려면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소설가들의 격언 비슷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가능한 사랑>을 보는 동안, 그리고 보고 난 뒤에도 내내 맴돈 것은 이 영화가 소설 같다는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닐뿐더러 어떤 영화를 두고 소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곧 영화적이지 않다는 뜻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에 소설적인 순간이 출현하는 것(소설적인 감각을 자아내는 것)과 영화 전체가 소설처럼 작동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일일 테다. 실제로 이 영화는 말이 많고, 그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중요한 종류의 영화이기도 하다. 소설적인 감각을 자아내는 영화와 소설처럼 작동하는 영화의 차이를 말하려면, 아마도 소설과 서사, 픽션, 허구처럼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자주 동원되지만 엄밀히 구분되지 않은 채 쓰이는 개념들을 갈라내는 지난한 절차와 기나긴 서두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혹은 이창동의 영화에서 사물이 등장하거나 인물이 말하지 않는 순간들(가령 <가능한 사랑>에서 아이가 들고 있던 과자 봉지가 바람을 타고 멀어지는 장면)을 면밀히 살피며, 영화적 묘사와 소설적 묘사의 차이 같은 것을 짚어보는 작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옷을 갈아입는 대목의 시나리오에 ‘흐느끼는 슬픈 엉덩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일화처럼, 이창동의 영화에서는 소설의 문어체적 묘사를 영상으로 번역하는 일이 종종 중요한 과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글이 어떻게 가능한지 잘 모른다. 대신 이 질문들을 축으로 떠올릴 수 있는 영화에 관한 여러 단상을 늘어놓아보려 한다.

소설과 픽션의 문제

<가능한 사랑>

소설과 픽션을 구분하는 데서 시작해보자. 이한범은 ‘픽션의 한계’ (<오큘로> 004호 ‘카운터-픽션, 내게 (다시) 거짓말을 해봐’)라는 글에서, 자신에게 픽션이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때그때 발생하는 개별적인 가능의 상태”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사는 종종 픽션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뒤섞여 쓰이지만, 사실 서사는 픽션을 만드는 기술 가운데 하나다. 이런 관점에서 소설은 서사가 효력을 지닌 채 발생하도록 하는 기술적 지지체에 가깝다. 이한범의 표현대로 픽션을 정의한다면 소설은 픽션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한 양식이라기보다 오히려 ‘가능의 상태’를 제한하고 일축하는, 가능태의 말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픽션을 만드는 기술은 ‘이러저러’가 수많은 구체성으로 변주될 수 있는 것처럼 무한히 개별적이며, 결코 서사나 소설에 한정되지 않는다. 또한 ‘그때그때’라는 표현이 암시하듯 픽션은 한없이 임시적이어서, 어느 순간 발생하고 소멸했다가 다시 불현듯 출현하기도 한다.

같은 글에서 이한범은 영화적 픽션의 사례로 질베르토 페레스가 장 르누아르의 영화 에 대해 쓴 글을 언급한다. 페레스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중요한 픽션으로 작동하는 것은 서사가 아니라 카메라에 담긴 풍경이다. 영화 중후반부에 주인공들이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카메라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배가 나아가는 방향의 풍경을 보여주는 대신 배의 진행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풍경을 찍는다. 한편의 영화 안에서 여러 차원의 픽션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카메라가 배의 진로와 반대 방향으로 풍경을 찍을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혹은 무엇이 가능의 상태로 출현하는 걸까? 그러나 카메라가 반대로 움직이는 이유를 추적하려 드는 순간, 그 장면에서 발생한 무언가가 개별적인 가능의 상태로 존재할 여지는 닫혀버린다. 서사의 인과적 연쇄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서사와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은, 화면의 운동을 통해 감지될 수 있는 영역.

그렇다면 서사와 이야기의 도식으로 빼곡한 <가능한 사랑>에서 픽션이 작동하는 순간을 짚어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다소 난감하게 느껴진다. 인과와 서사의 흔적으로 이어진 장면들은 (그 연결 방식을 언어화하기는 어렵더라도) 다른 장면들과 기민하게 맞물려 있어서, 픽션이 ‘개별적’으로 작동할 여지가 다소 협소해 보인다. 무엇보다 미옥(전도연)이 인터뷰에 응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재현된 이미지처럼 끼어드는 플래시백은, 구술되는 기억이 곧장 이미지로 현현하는 듯한 번역의 절차로서 픽션의 가능태를 축소한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우리는 그 장면이 누구의 시점에서 상상된 것인지 알아낼 수 없다. 그럼에도 말(이야기)과 화면 사이에 그어진, 일치에 가까운 선은 소설적 묘사를 영상 언어와 이미지로 가공하는 절차와 기술을 먼저 드러낸다(반면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거의 유일하게 픽션의 작동을 감지한 순간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이틀 전 우연히 들렀던 서계동의 한 골목이 미옥과 호석(설경구)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에 등장했을 때였다).

카메라를 든 사람

<가능한 사랑>

미옥이 수상할 정도로 묘사에 능한 사람이라면, 예지는 이상하리만치 카메라가 어울리지 않는 감독이다. 영화는 예지가 카메라, 혹은 카메라 너머의 세계와 얼마나 유리되어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가 걸치는 옷과 가방의 이질성을 강조한다. 카메라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옥의 지적을 사람 좋게 넘길 만한 넉살이 예지에게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장면 이후에도 카메라와의 불화는 쉬이 해소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예지가 카메라 뒤에서 짓는 얼굴에 있다. 옷은 바꿔 입어도 얼굴은 숨길 수 없다.

예지가 경찰의 폭력 진압에 의해 호석이 사고를 당한 순간이 담긴 영상을 보는 장면이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재의 커다란 모니터 앞, 반려견을 쓰다듬으며 영상을 보는 예지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예지는 정신을 잃은 채 경찰의 손에 잡혀 끌려가는 한 노조원의 얼굴을 확대해 본다. 그 얼굴이 호석이라는 것을 알아본 예지는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는 얼굴을 짓는다. 여기서 짚고 싶은 것은 그 얼굴의 윤리 같은 문제가 아니다. 모니터 앞에서 짓던 예지의 얼굴이 카메라 뒤편에서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의 얼굴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 예지는 카메라 앞의 대상과 거리를 두고 선 연출자라기보다, 그 대상을 영상으로 대면하는 사람의 자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얼핏 보면 영화는 예지를 통해 다큐멘터리 감독의 스테레오타입을 재현하는 듯하다. 스스로를 독립영화 감독으로 정체화하는 예지가 대화 중인 상대의 말을 끊고 카메라를 꺼내거나 작동하는 모습을 낱낱이 보여주면서, 영화는 은연중에 이미지를 향한 그의 탐욕을 짐작게 한다. 물론 이것은 영화가 그 세계에 속하지 않은 채 그곳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연출가 자신을 향한 자기혐오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지는 결코 감독의 자리를 대리할 수 없다. 그는 카메라 너머의 대상을 촬영하는 일과 녹화된 푸티지를 시청하는 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얼굴을 지녔기 때문이다.

연출가의 자기반영적 초상이 되는 데 실패한 영화는 기록하는 일의 폭력을 스스로 되비추며 상쇄하는 대신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놓인 무한한 심연을 씁쓸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타자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을 바라보는 부정성에 가까운 시선을 정해두고, 그 시선을 영화에 기입하려 한다. 모든 카메라는 불순하고, 그 불순함을 상쇄할 수 있는 형식적 돌파구는 드물거나 거의 없다. 픽션이 다큐멘터리의 윤리적 곤란함을 인용해야 한다면, 그 인용의 방식은 불순함을 인정하면서도 타자에게 다가가기를 멈추지 못했던 다큐멘터리스트들의 관성, 이미 어떤 세계에 파고들었기에 빠져나올 수 없는 연루됨을 드러내는 쪽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큐멘터리스트를 어떤 유형의 인물로 정박해 두는 쪽이 아니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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