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은 몸이 필요하다. 이원영 감독의 <미명>에서 아내가 죽은 이후에 남자의 육체는 파편화된다. 갈기갈기 찢기다 못해 기화하는 듯하다. 그는 말을 잃은 뒤 친구와 텍스트로 소통하며 술 한잔을 기울이고, 기계의 음성을 빌려 죽은 아내에게 말을 건다. 부부의 재회는 명멸하는 빛 아래에서나 가능한 것이었고, 그 모습은 유리창에 잠시나마 맺히는 신기루 같은 순간이기에 아련하다. 그것은 순간의 체험일 뿐, 기록될 수 없는 순간이다. <미명>은 아내를 잊지 못한 남자의 시간 여행과 같다. 남자는 아내와 함께했던 순간으로, 다시 말해 과거로 침잠한다. <미명>을 보고 있자면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내일이 없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왔던 길을 반대로 걷는다.”
유령이 된 망자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 역시 시간의 단절을 겪는다. 죽음은 남아 있는 자들의 시간을 변형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영화는 그것을 오랜 시간 단골 주제로 삼아왔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섹션에 초청된 12편의 한국 독립영화 중에서 가장 많이 보인 주제이기도 했다. 김진유 감독의 <흐르는 여정>과 신선 감독의 <미로>와 이광국 감독의 <단잠>은 망자를 잊지 못하는 유족의 트라우마와 극복 과정을 그린다. 세 작품 모두 인물의 심리를 탐구하는 서사 영화라면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은 서울이란 도시를 그리는 풍경 영화다. 죽음이 흔해진 살풍경한 도시 속에 주인공은 유령처럼 골목길을 배회한다. <씨네21> 영화평론상 심사 과정에서 송형국 평론가가 한국영화에 유령이 떠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 섹션에서 당시 <두 번째 아이>란 제목으로 선보였던 유은정의 두 번째 장편 영화 <그림자 아이>도 망자를 잊지 못하는 유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가장 직접적으로 ‘유령’을 다루며 데뷔작부터 이어진 유령 탐구를 이어 나간다.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 주인공 혜정(한해인)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된 이후 시간의 축이 뒤집힌다. 혼수상태인 혜정의 시간은 반대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 시간 속에서 혜정은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추적하는 탐정이 된다. 병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깨우기 위해 혜정은 과거를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시도 이후의 시점을 그리지 않고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반면 <그림자 아이>에서는 공간의 축이 뒤집히며 땅 아래 사는 그림자라는 존재가 사람들을 위협해온다. 땅을 기준으로 나뉜 두 세계를 추락과 비상을 통해 이동하는 판타지적인 <그림자 아이>는 전작과 동일하게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지만, 종국엔 모든 문제가 해소되는 완결된 서사를 선보인다. 결국 죽을 위기에서 두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는 진부한 결말인 <그림자 아이>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찝찝하게 미결인 채로 남아 있는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이다. 왜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인물들을 옭아매는 것은 ‘그림자와 두 아이’라는 잔혹 동화다. 그것은 금옥(임수정)네 집에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기록이다. 땅 아래 사는 그림자는 두 아이 중 하나의 몸을 내놓으라고 저주를 내린다. 하지만 두 아이가 함께 검은 문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화가 난 그림자는 끝나질 않을 저주를 내린다. “이 집안의 여자아이들은 14살이 되기 전에 두 아이로 만나리라! 몸을 내놓지 않으면 이 집안의 딸은 죽는다.” 이 저주 때문에 금옥의 아버지는 금옥과 닮은 한 소녀를 찾아서 죽인 뒤, 마당에 묻어 그림자에게 바친다. 이제는 금옥의 딸들이 곤욕을 치를 차례다. 언니 수련(유나)은 자신과 닮은 누군가를 본 후 그림자에게 그 사람 대신 자신을 바친 것으로 보인다. 수련은 남을 죽이고 생존하는 대신에 희생을 택하며 타인의 삶을 응원하는 쪽에 선다. 이 경우엔 수련이 혼자서 닮은 사람을 본 것이다. 그림자는 동생 수안(박소이)에게 더 고약한 장난을 친다. 그림자는 언니 수련과 닮은 재인(유나)을 등장시켜 수안을 우선 불안하게 만든다. 둘은 금방 친해지고 수련이 죽은 뒤, 방치된 옛집에 놀러간다. 그곳에서 그림자는 재인의 얼굴을 지우고 수안의 얼굴을 옮겨놓는다. 재인은 수안의 눈매가 오묘하게 닮은 도플갱어가 된다.
대개 도플갱어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한 인물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고 뒤쫓으며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그림자 아이>에서는 도플갱어를 눈앞에서 생성하여 선택을 강요한다. 이는 생존과 희생의 잔인한 선택의 게임이다. 전에 금옥과 닮은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죽었다. 수안과 재인은 친구에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경쟁 상대가 된다. 이와 비슷한 선택에 놓인 적이 있었다. 좀더 현실적으로 체감됐던 순간이기도 하다. 수안과 재인이 처음 만나고 들른 곳은 가출한 청소년에게 숙식을 제공한다며 손을 내미는 ‘헬퍼’의 집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남자가 들어오고 나가려는 이 둘을 막아선다. 남자는 재인에게 이곳을 나가려면 수안을 두고 가라고 말한다. 이 남자의 논리는 그림자와 똑같다. 둘에겐 그저 누군가의 몸이 필요할 뿐이지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림자의 저주에서 얼굴은 그저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타인의 얼굴은 죽음의 불안을 투사하는 하나의 스크린일까. <그림자 아이>에서 재인의 얼굴은 수련과 닮은 것은 분명하다. 금옥과 수안이 착각으로 그렇게 봤다고는 볼 수 없다. 재인이 수안의 옛집에서 수련의 사진을 마주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사진 액자 유리에 반사된 수련과 닮은 재인의 얼굴이 비친다. 위의 질문에서 말한 효과가 나기 위해서는 저 장면은 없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재인의 얼굴에 대한 기록은 이후에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도망친 재인을 찾기 위해 금옥이 학교를 방문했을 때 담임선생님의 상담 수첩에도 사진 칸은 공란이었다. 어쩌면 재인의 얼굴을 확인할 단서를 관객에게 주지 말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재인의 원래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를 모르게 해야 했다.
이러한 생각이 든 것은 수련과 닮은 사람이 다시 등장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불안을 투사하는 스크린으로서의 얼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금옥이 아버지가 금고에 숨겨놨던 편지를 읽고 난 뒤에 지난 행사 영상을 찾아본다. 거기서 수련과 닮은 학생이 행사에 참가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금옥의 상담 세미나에 현재 다니고 있었고 나중에 딸 윤서(전채은)와 함께 방문한다고 말한다. 행사장에 찾아온 이들을 숨죽이며 금옥이 바라본다. 하지만 윤서는 수련과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 어떤 얼굴이 그녀의 진짜 얼굴일까. 영상 기록에서 윤서는 수련과 닮은 얼굴이었다. 닮은 얼굴이 진짜라면 왜 달라졌는가. 명쾌히 말할 수 없는 미스터리함 속에서 기록된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금옥의 눈 사이에 모종의 불안감만이 흐를 뿐이다.
현재의 얼굴이 본모습이라면 과거 윤서의 달라진 얼굴에 가족들이 걱정했어야 했는데 영화상으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금옥의 가족이 그림자의 잔인한 저주에 억눌려 불안감에 휩싸인 채 애먼 사람을 보고 닮았다고 착각했다고 보는 쪽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닮은 얼굴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다. 금옥 대신 죽은 아이의 가족은 아이가 실종된 줄 알고 아이를 찾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었다. 금옥이 아버지 금고에서 발견한 전단지 속에서 아이의 현재의 모습을 추정한 이미지가 실종 당시 아이의 사진과 함께 배치돼 있다. 그 얼굴은 금옥의 얼굴과 닮아 있다.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판타지에서 정합성을 따지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완벽하게 맞지 않는 퍼즐이 주는 재미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금옥은 자식을 잃지 않기 위해 여전히 닮음이란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 금옥은 그게 누구든 자식을 위해 누군가를 그림자에게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애초에 수안과 재인은 닮음이란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다. 둘을 연결하는 것은 거울의 갈라진 틈새다. 그곳을 통해 그림자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림자는 외로운 두 사람을 엮어내 하나의 몸만 취하면 됐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혼자인 그림자의 외로움 때문에 시작된 이 잔인한 게임을 수안과 재인은 서로를 향한 목숨 건 희생으로 끝낼 수 있었다. 검은 문을 통과했을 땐 재인은 수련을 닮은 얼굴로 돌아왔는데, 다시 살아 돌아온 현실에선 수안을 닮은 얼굴이다. 왜 반대가 아니었을까. 영화 마지막에 안도하는 이들 사이로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재인의 얼굴과 외로움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