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초여름, 남산 영화진흥공사 인근 골목에 영화아카데미 3기 졸업생들이 차린 작업실이 있었다. 대안영화를 만들자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실상은 갈 곳 없는 감독 지망생들이 모여 잡담을 하거나 화질 나쁜 비디오로 영화를 보며 시간을 죽이는 곳에 가까웠다. 그날 나는 전날 마신 술이 덜 깬 채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영화아카데미 1년 후배 김형구 촬영감독이 들어섰고, 그 뒤로 키 큰 백인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따라 들어왔다. 런던에서 온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였다. 40년 가까운 우정의 시작이었다.
그가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설립과 이후 한국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그보다 앞선 시기, 한국영화가 비로소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무렵,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를 해외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가 맡았던,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역할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여러 나라를 오가며 새로운 영화를 발굴해왔다. 필리핀의 리노 브로카를 시작으로, 홍콩·대만·중국에서 일어난 뉴웨이브의 흐름 속에서 앤 후이, 관금붕, 허우 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첸 카이거, 장이머우 같은 감독들이 저마다 새로운 영화언어를 벼려내고 있었다. 아시아영화가 무섭게 떠오르던 그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고, 당시를 함께한 많은 아시아 영화인들이 지금도 그의 헌신을 또렷이 기억한다.
오랜 군사독재 체제 아래 선전영화, 호스티스영화, 하이틴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한국에서도 뉴웨이브의 싹은 조용히 트고 있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1980)과 <만다라>(1981)가 그 불씨였고, 1984년 영화법 개정은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새로운 제작 주체와 영화의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주었다(1984년 개정된 5차 영화법으로 영화 제작사는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바뀌었다. 제작사는 1년에 1편의 영화를 ‘독립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 독립영화의 물꼬도 트이게 되었다.-편집자).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한국 사회 전체가 크게 출렁이던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원래 한국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해 초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에서, 당국 몰래 반출된 프린트로 어렵게 상영된 한국 단편영화들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고, 이제 직접 가볼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세계영화계의 흐름에 거의 무지한, 말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까지는 직접 나가 경험을 쌓는 일조차 쉽지 않았고, 한국을 찾는 외국 영화인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1988년 이후 그는 매년 한 차례 이상 한국을 찾아 대학가 독립영화 상영 현장, 단편영화 감독들, 충무로 영화인들, 그리고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이던 김동호까지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홍익대학교에서 <파업전야>를 보다가 난입한 전경들이 쏜 최루탄에 눈물, 콧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는 극장 안에서만 영화를 판단하는 평론가가 아니었다. 현장을 찾았고,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회의 공기를 몸으로 느끼려 했다.
많은 감독들이 그에게 자신의 영화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단순히 외국 평론가에게 작품을 시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가 비로소 바깥 세계와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프로그래밍을 맡았던 밴쿠버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를 통해 무명, 유명을 가리지 않고 한국 감독들의 영화를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1980년대 후반 장선우, 박광수를 중심으로 본격화된 코리안 뉴웨이브가 해외에 알려지는 데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결정체는 그가 기획해 1994년 런던 현대예술연구소(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 ICA)에서 열린 <Seoul Stirring: 5 Korean Directors>였다. 임권택, 장선우, 박광수, 이명세, 김의석 다섯 감독을 소개한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상영회가 아니라, 코리아 뉴웨이브와 현대 한국영화를 서구권에 체계적으로 알린 사건에 가까웠다. 그렇게 다져진 코리안 뉴웨이브를 바탕으로 200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가능했고, 그 흐름은 훗날 K무비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한국영화를 세계에 소개한 여러 외국 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영화가 아직 스스로 세계와 연결되는 법을 알지 못하던 시기에, 그 가능성을 먼저 알아보고 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먼저 그 움직임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1988년 어느 초여름 오후, 남산의 허름한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 키 큰 외국인은 그렇게 한국영화의 한 시대와 깊이 연결되었다. 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피엔 아시아영화를 향한 열정이 흘렀다 - 말레이시아 프로듀서
토니 레인즈는 아시아영화계의 핵심 인물이자, 누구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시아영화를 향한 열정과 에너지는 그의 피와 영혼에 흐르고 있었다. 영화사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트리비아뿐 아니라, 끊임없이 영화와 영화인들에 관해 배우고, 사랑하고, 때론 냉정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와의 인연은 내가 에드윈, 호위항, 증국상 같은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의 젊은 영화인들의 작품을 제작할 때 시작되었다. 당시 변변치 않은 원고료밖에 지급할 수 없었지만 그는 기꺼이 작품의 프레스킷에 글을 써주었다. 그가 쓴 영화 글, 자막, 프로그래밍, 그리고 영화인들에게 건네던 조언은 언제나 예리하면서도 섬세했고, 또 유쾌했다. 그의 도움 덕분에 아시아영화들은 세계로 더 멀리 뻗어나가 세계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고 관객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뿐 아니라 아시아 음식을 향한 그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특히 딤섬과 감자탕을 함께 먹으며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우리가 그가 그토록 즐긴 음식들을 먹으며 그를 추억하게 될 것이다. 친구이자 멘토이자 든든한 우리 영화의 옹호자였던 토니,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배웠다. - 인도네시아 감독 에드윈
2008년, 내 첫 장편영화 <날고 싶은 눈 먼 돼지>를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공개했을 때 토니 레인즈와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영화제란 공간도, 쏟아지는 관심도, 그리고 너무나 사적인 얘기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압박감도 모두 벅차기만 했다. 그런 나를 그는 인터뷰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곁에 앉아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당시 우리는 내가 쉽게 꺼내지 못했던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란 나의 배경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나는 오해로 억눌러온 나의 감정과 분노의 파편들을 영화에 담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니는 그런 나를 바로 이해해주었다.
우리는 음식에 관해 이야기도 나누었다. 첫 만남 이후 우리는 여러 해 동안 함께 식사했다. 우리는 유럽 내 유명 중국 음식점인 타이우에서, 또 전 세계의 수많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토니는 홍콩 누들과 런던의 오리 요리, 그리고 부산 택시 기사와 트럭 운전사들이 찾는 감자탕집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몇년 뒤 나는 트럭 운전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나머지는 현금으로>(Vengeance is Mine, All Others Pay Cash)를 만들었다. 이를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만 그에게서 배운 건 아니다. 토니 역시 나만큼이나 호기심이 많고 열린 사람이라 나에게 인도네시아 음식에 관해 열정적으로 물으며 인도네시아 음식을 배웠고,우리는 함께 자카르타의 판타이 인다 카푹 시장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음식과 호기심, 그리고 일상의 작은 것들을 함께 바라보는 마음을 매개로 다양한 장소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넘나들었다.
토니를 만날 때마다 나는 음식뿐 아니라, 그 음식에 담긴 이야기와 사람들, 역사, 그리고 우리가 흔히 지나쳐버리는 작지만 인간적인 디테일에 관해 배웠다. 우리는 대개 영화 행사로 만났지만, 우리의 대화는 일반적인 의미의 영화 이야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계 사람들이 나누는 한담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얼마나 행운인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토니를 통해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영화에만 사로잡혀 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른 세계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새로운 호기심으로. 음식으로, 역사로, 인간의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프레임 너머의 삶으로.
나는 언제나 토니를 기억할 것이다. 함께했던 식사로, 조용한 대화로, 그리고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결국 인간에 관한 것이라던 그의 다정한 일깨움으로. 토니, 당신이 정말 많이 그리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