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우, 이 도살의 드라마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목록은 낯설지 않다. 한평생 투우의 용맹한 남성성에 매료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투우의 정교한 규칙과 세찬 접전에서 삶, 죽음, 글쓰기로 사색을 확장하는 논픽션 <오후의 죽음>(1932)과 스페인 투우계 두 라이벌의 대결을 기록한 <위험한 여름>(1985)을 썼고, 젊은 날 투우사를 꿈꿨으며 죽어서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의 사유지에 묻힌 오슨 웰스는 유작인 <바람의 저편>(2018)의 초기 각본으로 투우에 열광하며 마초성을 과신하는 노쇠한 영화감독과 그가 투우사로 길들이려는 젊은 배우의 이야기 <성스러운 야수들>을 쓰기도 했다. 투우의 나라 스페인 출신으로 죽음과 에로티시즘의 화두에 천착해온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은퇴한 남성 투우사의 도착성을 파고든 <마타도르>(1986)와 경기 중 입은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된 여성 투우사가 서사 한축을 이루는 <그녀에게>(2002)를 찍었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 투우사가 황소의 뿔에 눈이 뚫려 즉사한 현장을 목격한 조르주 바타유는 그의 파격적인 소설 <눈 이야기>(1926)에 그날의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실었다. 지독한 투우광 아버지를 따라 투우장을 드나들던 어린 날의 영향으로 평생 투우와 황소를 캔버스의 화두로 삼은 파블로 피카소는 이미 8살 나이에 말을 탄 투우사가 등장하는 <작은 노란 투우사>(1889)를 그렸고, “나는 도살장에 갈 때마다 그 동물 대신 내가 저곳에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에 늘 놀란다”라는 말을 남긴 프랜시스 베이컨은 링 한가운데서 투우사와 소가 한몸처럼 뒤엉킨 <투우를 위한 습작>(1969) 연작을 선보였다. 물론 비평가들도 있다. 앙드레 바쟁이 피에르 브론베르제의 다큐멘터리 <투우>를 중심으로 죽음에 영원한 물질성을 부여하는 영화의 속성을 논한 <매일 오후의 죽음>(1951)은 “스크린 위에서, 투우사는 매일 오후 죽는다”라는 문장으로 장엄하게 끝난다. 그리고 세르주 다네는 <매일 오후의 죽음>에 응답하듯 작성한 <오후의 슬픈 죽음들>(1977)에서 투우의 일회적인 죽음을 현대 미디어에서 반복 재생되는 기만적인 구경거리로서와 차별되는 진귀한 의례의 순간으로 바라본다.
여기, 투우를 찬미하는 더 많은 예술가의 이야기, 투우에 영감을 받아 창조된 더 다채로운 작품들의 사연을 끝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야 제각각이겠지만, 이들의 매혹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투우는 인간의 잔혹 취미나 말초적인 쇼가 아니라 죽음의 공포를 직시하며 모든 걸 걸고 싸우는 두 존재의 외롭고 정직한 승부다. 적어도 투우장 안에서 인간과 황소는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 투우는 폭력과 죽음이 태동한 아름다움의 양식이며 무엇보다도 엄정한 내적 규칙으로 작동하는 성스러운 의식이다, 등등. 이러한 감흥과 견해는 투우장 바깥의 우아한 관람자, 죽음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는 이들, 그러니까 타자의 죽음을 미학화하고 개념화할 수 있는 지식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현장을 온몸으로 경험해온 투우사들이 인터뷰에서 고백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다만 신화와 전통, 철학과 예술의 맥락을 환기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투우 예찬론에 덧붙일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투우의 형식과 그 형식의 필연적 결과인 죽음의 실재에 고차원적 의미를 투영하며 탐미하는 시선에는 이 경기의 본질을 신비화하는 구석이 없지 않다. 투우 예찬론자들에게는 더없이 무식한 말이라고 핀잔을 듣겠지만, 본질은 실은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투우사는 제 의지로 투우장에 당당히 입장하지만, 황소를 경기장 안에 들이는 건 인간의 강제다. 황소를 죽여야 인간이 산다.
여하튼 투우라는 세계가 오랜 시간 남성 예술가들의 심장을 뒤흔들어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그 목록에 동시대 최고의 괴짜 감독 알베르트 세라를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투우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고국인 스페인에서도 동물 학살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논쟁 중인 사안을 소재로 삼는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현존하는 전 세계 감독 중 그만큼 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자신의 영화가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지 예측 불가능한 행로를 시험하면서 관객의 당혹스러운 반응을 상상하고 즐거워하는 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호기심은 이 영화가 실제 투우사, 그것도 투우계의 스타인 안드레스 로카 레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에서 일었는데, 애초의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명민한 두뇌와 예리한 직관, 굴하지 않는 기세로 짐승의 야성에 맞서 수많은 승리를 거머쥔 선수와 현장의 즉흥성이 영화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천재성을 공공연하게 과시하는 감독. 두 사람의 기싸움에서는 누가 이길까. 투우사 안드레스 로카 레이는 알베르트 세라가 제공한 픽션의 울타리 안에서 유희하던 ‘배우’들과는 기개 자체가 다를 것이다. 투우사와 황소의 경기 장면보다 더 궁금했던 건 범상함과는 거리가 먼 투우계와 영화계의 전사 사이에서 벌어질 심리전이 영화 안에 일으킬 파장이었다.
<고독의 오후>는 예상과 사뭇 달랐다. 인간과 황소의 ‘진짜’ 결투가 빚어낸 잔혹함의 이미지나 움직임은 세라의 지난 극영화들이 전시하고 자아내던 감각적 충격에 비하자면 정교하게 짜여 어딘지 정제된 인상을 풍겼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 낭자한 피와 땀은 크게 선정적이지 않았다. 그런 인상이 다소 의외라고 생각한 데에는 투우를 그저 본능에 따라 격렬하게 치고받는 싸움으로 여기며 이 경기의 승패가 저돌적인 속력이나 힘의 세기보다는 정밀한 감각과 타이밍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미처 잘 알지 못했던 탓도 크다. 평소 세라가 혼돈과 미결정적인 상태를 제작 과정의 주요한 힘으로 강조해왔다는 점도 이 영화의 거친 리듬에 대한 성급한 기대를 부추겼을 것이다. <고독의 오후>는 투우사라는 직업인의 삶이나 투우를 위해 길러진 짐승의 운명에 주목하는 영화가 아니다. 현실과 분리된 링 안에서 일어나는 투우라는 양식은 세계를 사각 틀로 잘라내어 재구축한 영화의 형식과 어떻게 접속할 수 있는가. 세라의 관심은 죽음을 불사하는 사람과 짐승의 야생성을 포착하고 극화하는 일보다는 투우의 완고한 법칙과 세계관을 영화의 물질성으로 반응해 집요하게 조각하는 길로 향한다. <고독의 오후>는 선수와 관중과 짐승 모두가 격앙된 투우장에서 유일하게 흥분하지 않는 시선이다.
이 영화는 우선 투우사와 황소의 예상할 수 없는 동선, 언제 닥칠지 모를 부상과 죽음의 순간, 투우장의 공간성을 프레이밍하는 방식에 골몰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으나 관중석을 화면 밖으로 밀어낸 채, 오직 투우사와 황소의 대결에만 밀착해 집중하는 프레임은 둘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예견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동작을 시야 안에서 완전히 포괄하지 못한다. 중심이 명확한 투숏의 구도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프레임은 드넓은 경기장을 두 존재의 지평으로 축소하는 동시에 모든 힘을 화면 안으로 몰아 투우사와 황소 중 누구도 죽기 전에는 이 틀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일깨운다. 그렇다고 그 틀은 죽음이 도래할 순간을 그저 기다리는 시간의 지평만이 아니다. 세라는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을 보존하기 위해 극영화의 기법을 배척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투우사와 황소가 대치하고 충돌하는 움직임의 연속성은 롱테이크로 담기기도 하지만, 영화 초반 안드레스가 황소에 마지막 창을 꽂는 결정적인 국면처럼 장면이 순식간에 과감히 나뉘어 붙여지기도 한다.
세라의 문제의식은 극성을 강화하거나 사실성을 지키는 양자택일의 화두가 아니라, 프레임의 장력을 강력하게 구현하는 방식을 향한다. 투우사와 황소가 주고받는 최대치의 긴장감을 경기 이면의 감정이나 외부의 현실로 분산하거나 희석하지 않을 것. 투우의 에너지를 오직 화면 내부에 응축시킬 것. 세라의 이러한 의지는 특정 장소들을 벗어나지 않는 영화의 구조에서도 엿보인다. 대결이 벌어지는 투우장 안과 승패가 결정된 뒤 선수들이 앞선 경기에 대해 자평하는 자동차 안, 그리고 의식을 준비하듯 투우사가 의복을 입고 기도하는 호텔 안을 반복해서 오가는 구조는 세라에 따르자면 논쟁적인 주제와 이미지를 대면한 관객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주기 위한 것이지만, 그 의도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투우사와 황소에게 오직 링 안이 자신을 증명해낼 최후의 격전지라면, 투우 ‘영화’ 역시 그 링의 절대성을 떠안아야 할 것이다. 비록 링 한복판에서 그들과 똑같이 생사의 경계를 직접 겪을 수는 없어도 그 링을 가열하게 사수할 수는 있을 것이다. 투우사가 링에서 승부를 본다면, 투우 영화는 프레임으로 승부를 볼 것이다. <고독의 오후>가 투우를 프레이밍하는 방식과 투우 외부로 나가는 문을 차단한 설계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투우장 바깥의 휴머니즘이 아닌 투우장 내부의 투쟁에 온 힘을 다하라. 이 결단은 투우 ‘시네마’로서 세라가 부리는 영화적 야심이자 그가 생각하는 투우의 본질에 영화로 표하는 최대치의 존중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고독의 오후>의 프레이밍과 구조는 투우사의 서사 없이도 투우가 감당하는 필연적인 고독을 의식하고 반영한다. 링에 내던져져 상대의 공격만이 아닌 자기 내면의 두려움과도 싸워야 하는 외로움만큼이나 그 링이 전부인 자가 도무지 그 밖의 삶을 상상할 수 없어 대면하는 고독도 지독할 것이다. 스페인 투우계의 기인으로 정신질환을 앓으며 은퇴와 복귀를 번복하다 올해 초 경기 중 황소 뿔에 항문을 찔려 중상을 입은 모란테 데 라 푸에블라는 말한 적 있다. “투우장을 떠나면 내 인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독의 오후>가 관람자의 심신을 스크린 앞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들어둔 요인을 단순히 영화 속 투우의 현장감이라고 말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감흥이 흔쾌히 긍정하고 싶은 것인지, 껄끄러운 것인지에 관한 판단도 아직 잘 서지 않는다. 다만 이처럼 괴이한 쾌감의 정체, 이 영화가 관객을 홀리는 방식에 대해서라면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영화가 시작하면 어둠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던 소 한 마리가 불현듯 화면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거친 숨소리와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장면에 적막한 진동을 퍼뜨린다.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출현하는 숏은 직전의 자연성과 단절하듯 프레임의 한계를 강조하는 비좁은 차 안의 광경이다. 차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의 근거리에는 주인공 안드레스 로카 레이가, 그 뒤로는 동료 선수들이 붙어 앉아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정면을 향하는 안드레스의 시선이 카메라에 담긴다. 말하자면 짐승의 눈, 인간의 눈, 그리고 이들과 마주하는 카메라의 눈이 도입부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황소의 야생적인 눈과 투우사의 텅 빈 눈과 기계장치의 무심한 눈이 무엇을 바라보고 느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니,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도입부는 일종의 선언 같다. <고독의 오후>는 서로 다른 눈들로 작동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각자의 정면을 꼿꼿이 주시하는 눈들의 대결이 될 것이다. 투우장 관중석에서는 결코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눈들의 속성과 변화, 예민하고 전투적인 활동이 <고독의 오후>를 투우 ‘영화’로 만들 것이다.
도입부에 강렬히 새겨진 황소의 담대한 눈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짐승에게 주어진 환상 같은 것일까. 투우장 안에서 단 한번도 이루지 못한 소의 소망이 죽어서야 생생히 영화 안으로 귀환한 장면 같은 것일까. 투우사의 창에 찔려서도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던 소가 완전히 패배하는 순간은 소의 눈이 초점을 잃고 무력하게 흔들리다 완전히 감기는 때다.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그 패배에 방점을 찍듯이 대결의 끝마다 땅에 널브러진 황소의 눈에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다. 황소의 죽음은 눈으로 온다. 그러고 보면 끝만이 아니라 시작도 언제나 눈이다. 투우는 소의 시각적인 취약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경기다. 황소를 암흑 속에 가뒀다가 경기 시작 전 풀어줘서 과도한 빛으로 시야를 공격하는 전략은 잘 알려져 있다. 투우사가 물레타를 펄럭이며 마치 황소를 덫으로 유인하듯 그 행로를 조종하는 방식은 투우사의 몸보다 거대한 천의 움직임을 위협의 대상으로 인지하는 황소의 시각성을 노린 것이다. 투우장 안에서 황소는 어쩌면 눈으로 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땅에 쓰러져 기세를 완전히 상실한 황소의 눈이 화면에 겨우 맺히자마자, 더 이상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진 그 눈은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말들에게 끌려 일말의 동정이 깃들 여지 없이 재빠르게 프레임에서 퇴장한다. 소의 눈은 화면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잊힌다. 생존을 향한 사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이한 죽음을 연기할 수 없고 연출할 수 없는 그 눈의 존재감이야말로 <고독의 오후>에서 가장 투명하고 잔인한 ‘다큐멘터리’적 이미지다.
그러므로 투우사의 승리는 그의 눈의 승리와도 같다. 안드레스가 몸을 활처럼 한껏 꺾고 몸의 가동성을 최소화한 채 소를 노려볼 때, 화면에는 단 일초도 이완하지 않는 눈의 화력이 새겨진다. 황소에게 돌발적으로 공격당해 무참하게 넘어졌다 겨우 일어난 직후에도 그가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행위는 눈을 부릅뜨는 일이다. 그가 창으로 공격했으나 쓰러지지 않고 비틀거리며 버티는 소를 향해 그의 동료가 말한다. “놈이 너를 보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눈의 기세에서 밀리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를 만끽한 후, 어김없이 등장하는 차 장면에서 안드레스의 시선은 의미화하기 어렵다. 그 눈의 방향성도 심정도 모호하다. 그 눈은 투우장에서 한껏 고조되던 밀도에서 풀려나 그 안에 무엇도 담지 않은 고요한 표면처럼 보인다. 그건 무대 위에서 더 이상 자신을 과장하지 않아도 되는 눈, 팽팽한 대결의 위태로움을 버티지 않아도 되는 눈, 목적지로 향하는 차의 안정된 운동성에 그저 자신을 맡기고 내버려두는 눈이다. 이 눈은 공허하지만 평온하다.
<고독의 오후>에서 가장 처절하게 사라지는 눈이 황소의 것이고, 가장 쓸쓸해지고 마는 눈이 투우사의 것이라면, 가장 가련하고 나약한 눈은 말의 것이다. 황소의 돌진에 행여 겁을 먹고 도망쳐 선수가 낙마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말의 눈은 가려진다. 안대를 걸친 채 투우사를 태우고 황소와의 충돌을 감내하는 말은 이 영화에서 온전한 형상으로 화면에 위치하지 못하고 스치듯 지나가지만, 가장 잊기 어려운 이미지다. 기능을 빼앗기거나 잃고서야 겨우 살아남는 눈이 화면 한구석에, 그러나 투우장의 필수 이미지로 각인된다. 이 영화에서 투우의 치열함은 눈들의 기구한 운명으로 조직되고 견뎌진다. 그 사실이 피 흘리고 오물을 쏟으며 마지막 숨을 토하는 이미지들보다 더 가혹하다.
그에 비한다면 이 눈들로부터 거리를 확보한 카메라의 눈, 그리고 편집의 눈은 얼마나 고상하고 편리한가. 알려졌듯 <고독의 오후>의 투우 현장은 촬영 중에 무엇이 찍혔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최소화하며 세대의 카메라로 600분이 훌쩍 초과한 분량을 찍었다. 촬영 과정에서 장면의 중심을 미리 정하지 않고 카메라에 포착될 우연의 지대를 수용하기, 촬영이 끝난 후에야 카메라에 기록된 이미지들을 빠르게 살펴 직관에 따라 선택하고 그제야 날카롭게 편집하기, 그리하여 단순한 이미지 파편들을 혼돈의 활동으로 새롭게 구성하기는 이번 다큐멘터리에서도 세라가 고수한 원칙이다. 다만 <고독의 오후>를 보는 동안, 미지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환대해 희귀한 활기를 도모하는 그의 작업 방식에 장악의 욕망 또한 결부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어두운 숲속에서 인물들이 전라로 성적인 난장을 벌이는 <리베르테>(2019)의 배우들은 “카메라가 뭘 하는지, 뭘 선택할지, 자신에게서 뭘 끄집어낼지”(<필로> 13호) 모르며 촬영에 임했고, 루이 14세가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루이 14세의 죽음>(2016)의 배우는 어떤 카메라가 어떤 각도에서 자신을 찍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연기했다고 전해진다. 세라는 배우와 안정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카메라, 배우가 자신의 이미지를 예측할 수 없도록 설치된 카메라를 그의 영화에 모험적인 자유를 불러오는 주요 요인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배우들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카메라 여러 대의 시선은 산발적인 방향성을 가장해 실은 일방향적인 힘으로 오히려 그들을 포박하는 것은 아닐까. 현장에서 카메라가 열어낸 자유는 궁극적으로 편집실에서 세라의 눈이 세공할 프레임의 통제력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루이 14세의 죽음>과 <리베르테>가 우리에게 안긴 피로와 충격의 요체는 섹스의 시간 외부로, 죽음의 시간 바깥으로, 그러니까 세라가 프레임에 가한 압력으로부터 배우도 인물도 관객도 탈피할 수 없다는 감각이다. 추출하고 닫고 가둠으로써 세라의 프레임은 예술적 자의식을 강화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앞서도 언급했듯, <고독의 오후>가 투우를 장면화하고 구조화하는 방식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고독의 오후>의 프레이밍은 세라의 극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해 보이지만, 전작들에서는 체감한 적 없는 분열도 잠재한다. 이를테면 투우장의 관중석을 화면에 들이지 않은 세라의 고집은 투우사가 관중석으로부터 동떨어져 경기장 한가운데서 느끼는 투우의 영적인 면모란 관중과 공유할 수 없는 가치라는 생각에 기인한다. 그가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러한 선택에는 투우를 관중의 열광으로 소비되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투우사와 황소의 영적인 예술로 재현하려는 의도가 배어 있다. 그러나 세라가 아무리 프레임에서 관중석의 실물을 배제하고 환호만으로 실체를 추상화해도 그 집단의 리얼리티는 이미 화면에 내재한다. 투우는 투우사와 황소 그리고 관중의 액션과 리액션이 매 순간 맞물린 세계다. 영적인 가치와 학살의 쾌감이 실은 경계 없이 연동하는 다층적인 현장에서 세라의 프레임은 전자를 구하려는 시도에 더 가깝겠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애초 후자 없이 성립될 수 없다. 세라의 전능한 편집의 눈이 투우장을 둘러싼 관중석을 지울 수는 있을지라도 그들 눈의 잔상마저 프레임에서 완전히 증발시킬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환기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호텔과 투우장과 차를 이행하는 영화의 일관된 흐름이 깨지는 대목이다. 경기 중 소에 받혔으나 승리한 안드레스가 차에 오르자 동료들은 그를 순수한 투우의 결정체로 영웅시하며 과하게 칭송한다. 그들에게 무표정하게 호응하던 안드레스가 차창을 바라볼 때,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바깥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것이 안드레스의 시점숏인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정경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장면의 장소가 투우장이 아닌 차 안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번에는 안드레스의 좌석이 비어 있다. 동료들의 말을 듣건대 비극이 될 뻔한 경기가 막 끝났으며 안드레스는 심각하게 다쳐 차에 타지 못한 것 같다. 달리 말해, 세라는 안드레스에게 큰 부상을 입힌 경기 장면을 의도적으로 여기 넣지 않은 것이다. 600분이 넘는 촬영분 중 이 경기를 담은 장면이 없을 리 없다. 선수의 스타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피의 외설적인 스펙터클을 차단하기 위해서일까. 어느 쪽이라도 무적의 알베르트 세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생략이다. 무엇보다 황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별 동요 없이 주시하던 장면들을 떠올리자면, 이 누락은 공정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누락에는 신기한 구석이 있다. 카메라의 무심한 눈도 대응하지 못하고 편집의 전능한 눈도 재구축하지 못하는 대결의 실재성, 떠버리 투우사들의 수다로만 겨우 경박하게 묘사될 뿐인 승부의 폭력성과 피의 비극성. 알베르트 세라의 자신만만한 프레임조차 닿지 못한 지대. 이미지로 저장할 수 없는 ‘진짜’ 투우가 벌어진 장소, 그곳이 <고독의 오후>의 가장 고독한 뿌리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