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배우 W. C. 필즈에게 흔히 귀속되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나 동물과는 절대 함께 작업하지 말라.” 이 말은 주로 아이와 동물은 연출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격언의 더 흥미로운 함의는 따로 있다. 아이와 동물은 스크린에서 ‘시선을 빼앗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들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고, 대개 어른 배우보다 더 생생하게 화면을 장악한다.
카를라 시몬은 데뷔 이후 줄곧 이 격언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아이와 동물은 통제해야 할 변수가 아니라 세계를 살아 있게 만드는 주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로메리아>는 흥미로운 전환점이다. 이 영화에도 여전히 동물이 등장하지만, 처음으로 아이가 아닌 갓 성인의 문턱을 넘어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일종의 자전적 가족 3부작으로 구성된 시몬의 영화에서 마지막 작품이 유년기를 벗어나 성인기의 문턱에 선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로메리아>의 변화는 주인공의 나이에만 있지 않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카메라의 태도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카메라는 대체로 인물을 분석하지 않고 차분히 드러내는 쪽에 가까웠다. 감정은 몸짓, 놀이, 노래, 미묘한 눈짓에 스며들었다. 반면 <로메리아>에는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인물의 심리 상태를 가시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테면 마리나가 자신의 아버지가 1987년이 아니라 1992년에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돌리 줌으로 주인공에게 급격히 다가간다. 마리나 뒤편에 수평으로 놓였던 책장이 크게 구부러질 정도로 노골적인 이러한 돌리 줌은 세계의 축이 어긋나는 감각을 영상 언어로 표현한다. 시몬의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던 직설적인 방식이다.
이 변화는 영화 전체의 형식적 방향과도 맞닿는다. <로메리아>는 후반부에 그동안 시몬의 영화에 붙어 있던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에서 한 걸음 벗어나, 감독 자신의 표현대로 ‘마술적인’ 영역으로 과감하게 진입한다. 부모의 마약중독에 관한 이야기를 듣던 마리나는 문틈으로, 영화 초반 아버지가 머물던 배에서 마주쳤던 고양이를 다시 본다. 그리고 그 고양이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향한다. 여러 스페인어·카탈루냐어권 비평은 이미 이 고양이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혹은 체셔 고양이에 비유했다. 그러나 이 고양이는 <로메리아>에서 처음 돌출된 장치가 아니다. 카를라 시몬의 영화에서 동물은 늘 아이가 어른들의 침묵 너머로 진입할 때 출현했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고양이는 프리다가 처음 삼촌 집에서 눈을 떴을 때 나타난다. 낯선 집, 낯선 가족, 설명되지 않은 죽음이 아이를 둘러싼 순간이다. 직후 프리다는 닭이 달걀을 쪼아먹는 장면을 보고, 정육점에서 닭고기가 머리부터 해체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한다. 후반부에 고양이는 주인공이 가진 알레르기 때문에 사라진다. 결말을 앞두고 아이는 HIV 바이러스가 “몸속에 있던 아주 작은 동물” 같은 것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어쩌면 프리다에게 에이즈는 의학적 개념이 아니라 고양이처럼 쫓아낼 수 있는 작은 생명체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알카라스의 여름>에서는 죽은 토끼가 반복해 등장한다. 아이들은 과수원 아래에서 죽은 토끼를 발견해 이주노동자와 함께 애도하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수영장에서 토끼 시체를 건져 할아버지에게 달려간다. 여기서 토끼는 밭을 망치는 존재이자 농촌의 일상을 구성하는 배경이다. <알카라스의 여름>의 토끼는 경이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아닌 가족의 마지막 여름이 사라져가는 징표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에서 죽음이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이었다면, <알카라스의 여름>에서 죽음은 공동체에 이미 스며든 현실이다.
반면 <로메리아>의 고양이는 잡히지 않는 과거로 들어가는 문이다. 고양이는 더 이상 세계의 불가해함을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아니라, 그 세계로 진입하도록 문을 열어젖히는 안내자다. 이 점에서 카를라 시몬은 전작과 다른 위험을 감수한다. 마리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제한된 시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보고, 묻고, 기록한다. 서류상 혈통을 인정받기 위해 비고로 향하지만, 실제로 찾는 것은 행정적 증명이 아니라 자신에게 없는 기억이다.
영화가 가장 예리해지는 순간은 비고의 아버지쪽 가족을 관찰하는 몇몇 장면이다. 고모가 마리나의 겨드랑이 털을 힐끗 보는 장면은 마리나와 가족 사이에 놓인 계급적 거리를 단번에 드러낸다. 손주들이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장면은 이 가족의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에서 가족은 티격태격하면서도 끈끈한 공동체라기보다 작은 제도처럼 보인다. 혈연은 애정인 동시에 분배와 승인과 복종의 형식이기도 하다.
카를라 시몬 영화에서 힘을 발휘하는 건 이런 디테일이다. <로메리아>는 마리나를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를 한발 떨어져 바라본다. 다만 이 영화는 ‘마술적’ 장면을 도입해 그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린다. 고양이를 따라 시작된 후반부 환상에서 마리나는 부모의 과거를 바라보고, 산타 콤파냐를 연상시키듯 하얀 천을 뒤집어쓴 채 춤추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이 장면은 이제껏 시몬 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음악의 적극적 사용과 결합한다. 여기에 영화 전반에 걸쳐 마리나가 찍은 캠코더 영상이 더해지면서 <로메리아>는 극영화라기보다 사적 아카이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대목은 카메라와 인물 사이 거리에 파열음을 낸다. 마리나는 환상 속에서 아버지에게 키스받고, 어머니와 나란히 앉는다. 현실에서도 아버지쪽 조부모에게 혈통을 인정받는다. 모든 일을 끝낸 뒤 마리나는 “내가 찍을 테니 카메라를 이리 내”라며 스스로 촬영하기 시작한다. 결말은 완전한 봉합처럼 보인다. 문제는 바로 그 분명함이다. <로메리아>는 감동적인 성장 서사이자 시몬이 영화적 언어를 넓히려는 야심적 실험이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여전히 전작과 비슷한 리얼리즘쪽에 더 많고, 후반부 환상은 그저 과잉 보상처럼 보인다.
<프리다의 그해 여름>은 아이의 눈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끝까지 확정하지 않았다. <알카라스의 여름>은 가족을 폐허 앞에 세워두고,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영화의 힘은 해결이 아니라 유예에 있었다. 반면 <로메리아>는 고양이를 따라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 상처의 의미를 이미지로 짜맞춘다. 이 시도는 때로 전작이 지켜냈던 불가해함의 거리를 좁혀버린다.
알 수 없고 불가해한 과거를 낱낱이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그것을 미지의 영역에 남겨두는 편이 더 깊은 애도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런 환상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마리나는 이미 자기 삶의 카메라를 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앨리스가 토끼 굴에서 배운 것이 세계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이었다면, <로메리아>가 주는 답은 세계를 지나치게 평범하게 만든다.


